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짓밟히는 다수당의 권리


지난 1964년 미국 의회에 피부색깔ㆍ인종ㆍ종교 따위를 이유로 공공장소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民權法)이 상정됐을 때 남부출신 의원들은 무려 75일간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필리버스터링을 이어갔다. 너무 오래 지속돼 상원은 어쩔 수 없이 역사상 처음으로 강제적 토론 종결을 결정해야만 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인 1964년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5시간19분 동안 쉬지 않고 연설한 기록을 갖고 있다. 제6대 국회의원 시절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일본 비자금 수수를 폭로한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상정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연설은 기네스북에도 오를 정도로 우리 국회 역사상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지금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국회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반복되는 소수당의 무력시위 의회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소수당이 다수당의 법안 상정을 막을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은 오로지 필리버스터링뿐이다. 미국 남부출신 의원들이 75일간 필리버스터링을 한 것도, 김 전 대통령이 5시간 넘게 연설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만약 필리버스터링으로도 법안 상정을 막지 못하면 소수당으로서는 그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은 마땅치 않다. 투표 숫자에서 우위에 있는 다수당이 법안 표결을 밀어붙이면 어쩔 도리가 없다. 이것이 의회 민주주의고, 국민이 다수당에 부여한 권리다. 그런데 최근 우리 국회에서는 이런 원칙이 철저히 짓밟히고 있다. 이번 18대 국회 들어 여야 대결이 이어지면서 국회 원구성 협상조차 무려 8개월 만에 타결됐다. 그 사이 국회는 공전됐다. 이어 벌어진 미국산 쇠고기파동으로 국회는 또 다시 올스톱되는 역사가 이어졌고 2008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직권 상정 때에는 국회에 해머와 전기 톱까지 등장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빚어졌다. 18대 국회가 끝나가는 올해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한미 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둘러싸고 회의장 불법 점거와 무력시위가 재연되고 있다. 설령 한미 FTA가 우리 경제에 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무력시위는 명백히 의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처사다. 무력으로 법안 상정을 막는 것은 법이 부여한 권리가 아니다. 그것이 야당이 주장하는 날치기 상정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 4년 전 이미 국민이 다수당에 그럴 권리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 심판 역시 국민이 하는 것이지 결코 소수당의 몫이 아니다. 몸으로 막아설 게 아니라 국민의 심판이 내려지는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미국의 경우도 한미 FTA에 반대하는 의원이 적지 않았지만 상정 자체를 막지는 않았다. 당당히 표결 처리한 뒤 반 FTA파들은 비준안 통과를 받아들였다. 한미 FTA 반대의 선봉에 섰던 마이크 미쇼드 민주당 의원이 최근 주미 한국대사관이 주최한 '미국의 FTA 비준안 축하 리셉션'에 참가해 축하해주는 모습은 반대하더라도 다수결 원칙에 의해 결정되면 깨끗이 승복하는 선진 정치의 진수를 보여줬다. 코리아디스카운트 만드는 정치 우리 역시 이제 국회에 만연하는 '떼법 문화'를 끊어버릴 때가 됐다. 어느 당이 다수당이 될지 모르고, 총선이 몇 개월 남지 않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그동안 이미 20여 차례 이상 국회폭력방지법이 발의됐으면서도 법제화가 안 된 것은 국회의원 스스로 제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법안을 마련하기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법으로 제도화되지 않는 한 국회 폭력은 내년에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다수당이 바뀐다고 한들 마찬가지다.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이 부여한 다수당의 권리가 존중되지 않는 후진적 정치문화가 지속되는 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만 만들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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