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조흥은 어느덧 ‘100년세월’

◎근대사 온갖 질곡 헤치며 민족자본 산실로…/민영찬 등 선각자 9명 한성은 설립/일제거쳐 60년대 경제개발 ‘돈줄’/80년초 장영자사건 한때 위기/총자산 52조… 리딩뱅크 우뚝조흥은행이 19일로 창립 1백주년을 맞았다. 조흥은행의 1백년 역사는 곧 한국 근대금융의 1백년을 상징한다. 1897년 2월19일 독립협회 발기인이었던 김종한, 민영찬 등 민족 선각자 9명에 의해 설립된 한성은행이 조흥은행의 전신으로 한성은행은 국내최초의 근대식 금융기관이었다. 이후 한성은행은 1920년 해동은행 합병, 1941년 경상합동은행 합병 등을 거쳐 1943년 10월1일 동일은행과 합병하며 「조선의 부흥」을 의미하는 조흥은행으로 새출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방후 조흥은행은 6·25전쟁, 4·19혁명 등의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자립경제 건설을 위한 대열에 합류했고 특히 1960년대부터 국가적인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저축증대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각종 저축우대정책을 통해 저축(내자)을 극대화하고 이를 수출산업과 같은 전략부문에 집중투입하는 불균형 성장전략을 구사했다. 70년대 역시 중화학공업화 추진을 위해 강력한 저축증대정책이 지속됐다. 이에 따라 70년대 초 21%이던 저축률은 70년대말 26%로 늘었다. 그러나 조흥은행은 80년대초 이철희·장령자사건, 영동개발사건이라는 대형금융사고를 당해 휘청거렸다. 부도금액이 6천억원이 넘는 이·장 사건과 연이어 터진 영동개발사건으로 조흥은행은 은행장이 연이어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이후 조흥은행은 타 시중은행의 협조예금 등 각종 지원과 은행직원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부실을 점차 축소하며 내실을 다지는 경영전략을 구사, 선두은행으로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조흥은행은 94년이후 6대 시중은행중 3년연속 당기순이익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창립 1백주년을 목전에 두고 조흥은행은 한보부도사태로 우찬목 행장이 구속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총자산 52조원에 이르는 은행의 규모로 볼 때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창립100주년 다양한 행사 조흥은행은 1백주년을 맞아 21세기를 향한 비전을 선포, 2000년까지 업무이익 1조원, 자기자본비율(BIS) 10%를 달성해 국내 최고은행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2004년까지는 세계 30대은행에 진입하겠다고 밝혔다. 조흥은행은 창립 1백주년을 맞아 각종 사회공익사업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먼저 조흥은행은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전문 박물관으로 「조흥 금융박물관」을 설립, 근대금융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학습장으로 삼을 계획이다. 또 이미 공익재단으로 「조흥백년재단」이 설립돼 ▲학술진흥사업 ▲문화, 장학사업을 추진중이며 청소년 지도육성을 위해 한국청소년 개발원 후원사업도 진행할 계획이다. 이외에도 ▲기념우표·광고엽서 발행 ▲기념 리셉션 및 선배 행우 초청행사 ▲직원서명모음 병풍제작 등 다양한 행사를 갖는다.<안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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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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