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더블 클릭] 밀감 밭의 해녀


'잠년 아기 나 뺌 사을이민 물에 든다'. 해녀는 아이 낳고 사흘이면 바다로 들어간다는 뜻의 사투리에는 척박했던 제주 여인들의 고된 일상이 배어 있다. 거센 바람과 논농사가 어려운 화산섬의 척박한 땅, 고기 잡으러 나갔다 돌아오지 않는 남정네…. 질곡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제주 여인들은 삼국시대부터 독특한 일거리를 찾아냈다. 세계 무형문화유산에 오를 만한 직업. 바로 '해녀'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도 등장하는 제주 해녀는 착취의 대상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해녀와 관련된 기록은 공물(貢物)인 전복을 바치기 위해 해녀들의 등골이 빠진다는 내용 일색이다. 제주목사 이원조는 헌종 9년(1843년) 펴낸 '탐라지초본'에서 '일년 내내 진상할 전복과 미역을 캐는 고역이 육지 농부의 10배'라고 탄식했다. 근대의 문이 열렸어도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제주도 물산의 중추로 떠올랐지만 노동의 이익은 마치 포주처럼 군림하는 물상객주들에게 돌아가고 해녀들은 빚에 허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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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에서는 일본인 잠수부의 영역 침범과 해녀조합의 횡포가 해녀들을 짓눌렀다. 해녀들이 1932년 초 500명~1,000명 단위로 모여 해녀조합을 규탄하고 일본 순사들을 습격한 시위사건은 독립운동사의 한 쪽을 장식하고 있다. 해방 후에는 경남 해안에 나가는 출가(出家) 해녀에 대한 과도한 입어료 요구로 인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해녀들이 노동만큼의 대가를 가져간 것도 잠시. 오늘날 제주 해녀들은 엔저에 따른 대일수출 격감, 방사능 공포로 인한 수요 급감에 부닥쳤다. 오죽하면 해녀가 밀감 농장에서 귤을 따고 마트에 나와 판촉행사를 벌일까.

△해녀들을 속 터지게 만드는 소식이 하나 더 있다. 우리 해녀들이 지난 2007년부터 추진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일본이 뒤늦게 따라붙었다. 잠수해녀는 전세계적으로 한국과 일본 두 곳에서만 존재하지만 제주 해녀는 남성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몸을 끈으로 묶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본 해녀와는 격이 다르다. 끝을 알 수 없는 제주 해녀들의 수난사에 가슴이 저린다. 오늘 저녁에는 마트에 나가 제주산 참소라를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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