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북미 한인사회 오늘(한민족경제권이 떠오른다)

◎땀과 눈물로 쌓은 95년… 부·명예 “우뚝”/미·가 교포 210여만명… 1인소득 한국의 2배/뉴욕선 청과상­85% 세탁소­60% 등 상권장악/세계적 제조업체 사장·연방의원 등 잇단 탄생/‘국내기업 미주교역진출 교두보역’ 활약 기대「LA의 월스트리트」라고 불리는 윌셔 블러바드. 이곳을 지나면 보이는 건 모두 한국간판이다. 한국 음식점은 물론 교포은행, 호텔, 쇼핑센터, 중고차매매점 등 한인들이 운영하는 점포가 즐비하다. 밤에는 한인들로 구성된 자경대들이 쇼핑몰을 순시한다. 지난 92년 「LA 폭동」 이후 이민족의 공격으로부터 자체 방어를 위한 자구책이다.윌셔 블러바드에서 올림픽 애비뉴, 웨스턴 애비뉴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은 서울시 LA구라 불릴 정도로 한국의 거리나 거의 다름없다. 미국땅에 한인 이민이 시작된 지도 올해로 벌써 95년이 된다. 지난 1902년 12월22일 제물포항에서 하와이행 미국상선 갤릭호에 오른 사람은 모두 1백21명. 20명은 일본 고베에서 신체검사에서 탈락해 중도 하선하고, 나머지는 20일간의 지리한 항해끝에 1903년 1월13일 호놀루루항에 입항했다. 그로부터 1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미국땅에 사는 교포 수는 많게는 2백만명을 헤아린다. 서울시 인구의 5분의 1 또는 부산시 인구의 절반 정도가 미국땅에 옮겨와 살고 있는 셈이다. 초기 이민자의 후손은 이미 3세까지 내려갔고 60, 70년대에 건너온 한인 사회의 주류도 이미 자녀들이 사회에 발을 내디뎌 재미 한인사회는 평균 1.5세대의 연대기를 기록하고 있다. 재미 한인들이 미국땅에 정착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땀과 눈물의 결정이었다. 초기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태평양을 건너온 개척자들은 낮이면 수수밭에서 막노동을 했고, 밤이면 움막에 웅크려 밤을 지샜다. 심한 중노동과 언어장벽, 향수병 등 정신적 고통을 견디다못해 쓰러지는 사람도 적지않았다. 매일 10시간씩 일을 해도 하루 품삯은 고작 69센트. 한숨과 고통으로 숱한 밤을 지샌 초기 이민자들. 그러나 이들은 미주 한인사회 건설과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광복운동의 주춧돌이 됐다. 해방후 60∼70년대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고 대거 도미한 이민자들은 현재 한인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국에 이민온 한국인들은 대부분 노동일부터 시작했다. 단순노둥중 가장 손쉽게 얻을수 있는 일은 청소와 봉제공장 작업 같은 것이었다. 언어문제도 있고 사회 구조상의 차이점도 있기 때문에 미국 사회의 하층직업을 두루 전전하면서 약간의 밑돈을 마련했고 이어 소규모사업으로 진출했다. 대도시의 노점상이나 행상에서 식품점, 잡화점 등으로 규모를 넓혀갔다. 현재 뉴욕시의 경우 청과상의 85%, 식료품상의 70%, 네일살롱의 80%, 세탁소의 60%를 한인이 경영하고 있다. 인구 2백만의 애틀랜타에서는 식품점의 3분의 2를 한인이 장악하고 있다. 한인들은 다른 민족보다 부지런히 일했다. 남들보다 일찍 문열고 밤늦게까지 영업했기 때문에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한인들은 흑인이나 라틴계 히스패닉이 밀집한 빈민촌에 들어가 장사를 했기 때문에 절도, 강도, 살인등 각종 범죄에 시달려야 했다. LA 폭동은 그 단적인 예다. 이민 1세가 겪었던 고난의 세월이 지나면서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 성공한 한인들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 시스템의 이종문 회장을 비롯, 통신사업체 자일랜사를 창업한 스티브 김씨 등 제조업에 진출, 성공하는 한인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정치에 뛰어들어 후보자로 나서는 한인들도 늘고 있다. LA인근 다이아몬드시에서 시장을 지냈던 김창준 연방하원의원은 한국서도 잘알려져 있는 인물. 여성으로 가장 높은 공직에 오른 인물로는 웬디 그램 여사를 꼽을수 있다. 그녀는 지난 88년 2월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장관급인 연방선물교역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며, 지난 96년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남편 필 그램 텍사스주 연방상원의원을 돕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상원 법사위원장을 맡았던 알프레드 송, 하와이 이민 3세로 주하원의원에 오른 재키 양, 호놀루루 시의원인 도나 김씨 등도 꼽힌다. 캐나다 한인들도 20세기초에 이민을 시작, 60∼70년대에 주류가 형성됐다. 캐나다 한인 사회는 아직 10만명 정도로 미국거주 한인보다는 그 규모가 적다. 캐나다의 도시나 경제 규모가 미국보다 자그만하기 때문에 캐나다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차츰 활동영역이 넓은 미국으로 건너가는 추세다. 토론토에 5만명 정도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뱅쿠버에 2만명이 살고 있다. 미국의 LA나 뉴욕에서처럼 한인타운을 형성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한인 코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단계다. 북미주 한인들의 삶의 질은 백인 주류사회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초강대국인 미국과 선진7개국(G7) 국가인 캐나다에서 한녁을 차지하고 있는 그들의 경제력을 무시할수 없다. 워싱턴주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손창묵 박사는 재미교포의 1인당 소득이 한국의 1인당 소득의 2배에 해당하므로 한국 전체 국민소득(NI)의 6% 정도가 재미교포의 총 경제규모라고 추정했다. 특히 한인 교포들이 LA·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뱅쿠버에 이르기까지 북미주 서부에 밀집해 있기 때문에 태평양 국가를 표방하는 미국과 캐나다로서도 한국과의 교역을 위해 미주 교포의 자원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미주 진출의 교두보로 교포를 활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손박사는 지적했다.<로스앤젤레스=김인영 특파원>◎이민 애환/초기 하와이 농장 이민자 장가못가 애타/고국처녀와 「사진맞선」 추진 1,000쌍 성사 초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결혼이었다. 중노동에다 언어와 풍습의 차이, 고국에 대한 향수로 이민자들은 의욕을 상실했고, 가뜩이나 나라를 잃은 설움까지 겹쳐 술을 마시거나 폭력에 도박까지 손을 대는 사람도 있었다. 현지농장측에서는 한인 이민자에 대한 대책을 궁리하던 끝에 한인 노동자중에 노총각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에게 평생 짝을 찾아주면 정신적 방황을 멈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하와이엔 아시아계 여성이 드물었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사진결혼이었다. 남성이 전부였던 이민자들은 사진을 고국의 고향에 보냈고, 사진으로 선을 보고 시집가겠다는 처녀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정부도 마지못해 사진결혼 신부에게 영주권을 줬다. 사진신부 1호는 1920년 당시 23세의 나이로 호놀루루에 시집 온 최사라씨였다. 그후 14년간 사진결혼이 이어져 1천여명의 여성 이민자가 생얼굴 한번 못 본 채 미국땅에 건너오게 됐다. 사진 신부들은 신랑보다 교육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가정생활, 현지 적응등에 문제점이 있었으나 자녀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보여 한인 2∼3세들이 미국땅에 뿌리내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다. ◎인터뷰/스티브 김 자일랜사 사장/“84년 차고서 공장설립 나사 등 납품 품질인정 작년 IBM과 공급계약 연매출 1억3,000만불 전재산 한인사회 기여” LA 한인사회에서 성공한 한인을 꼽으라면 단연 자일랜(Xylan)사의 스티브 김(48·한국명 김윤종) 사장을 꼽는다. 아시안 빌 게이츠」라고 불리는 그는 무일푼으로 첨단 하이테크 산업에 뛰어들어 연매출 1억달러의 초고속 성장기업을 일궈내 미국 증권시장이나 언론에 각광을 받고있다. 컴퓨터 전환장치를 생산하고 있는 자일랜을 창업하기까지 김씨가 겪었던 길은 실로 험난했다. 『76년 서강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올때만 해도 김씨는 영어가 통하지 않아 고생을 했습니다. 79년 미국회사에 잠시 취직한후 84년 친구와 함께 자기집 차고에서 파이버먹스라는 전자부품 공장을 차렸지요.』 애플사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동료와 함께 아버지의 차고에서 퍼스널컴퓨터를 조립했다가 대기업을 창업했다는 전설적 신화나 김씨의 창업과정이 별로 다를바 없다. 그는 파이버먹스에서 생산한 데이터통신 시스템을 미항공우주국(NASA)과 백악관에 납품,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김씨는 더 큰 회사로 발전하기 위해 파이버먹스를 매각하고, 매각대금 5천4백만달러로 93년 자일랜사를 창업, 시스코시스템·3M 등 미국의 쟁쟁한 경쟁업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최대 컴퓨터 회사인 IBM이 자일랜 제품을 공급받기로 계약을 했다. 이에 대해 김씨는 『IBM과의 계약은 자일랜으로선 혁명이나 다름없다』며 『IBM에 제품을 팔수 있는 활로를 틀 수 있게 된 것도 중요하지만, IBM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자일랜은 미국 타임지 선정 1백개 초고속성장 기업중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지난해 매출은 1억3천만달러로 전년대비 판매증가율 3백33%, 즉 4배이상의 초고속 성장을 기록했다. 김사장은 갑작스럽게 돈방석에 앉았지만, 돈에는 욕심이 없다고 밝힌다.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특히 한인사회에도 기여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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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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