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부터 국채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추가 양적완화(QE)를 통해 시중에 돈을 풀려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정작 매입할 물건이 부족해 정책 실행에 어려움을 겪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 때문에 안전투자자산인 분트(독일국채)에 전 세계 주요 중앙은행과 시중은행·보험사들의 수요가 몰려 자칫하면 ECB가 이들과 매수쟁탈전을 벌일 판이다.
26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ECB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경기부양을 위해 다음달부터 내년 9월까지 매월 600억유로(약 74조8,050억원)어치의 채권을 사들일 예정이지만 우량국채 물건 품귀 문제를 풀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ECB는 회원국별 출자비율 등에 따라 QE 프로그램의 국채매수 비중을 정하게 된다. 이를 감안할 경우 ECB가 QE를 통해 사들여야 하는 분트 물량은 월평균 120억유로 안팎으로 추산되는데 시장의 물량이 이를 받쳐줄지는 미지수다. 당장 올해만도 독일 정부가 발행할 2~30년 만기 분트는 1,470억유로에 이르지만 연내 만기 도래하는 기존 발행물량도 1,320억 유로나 되기 때문에 순발행 물량은 150억유로 규모에 불과하다고 WSJ는 지적했다. 과거 미국이 대규모 국채매입을 성공적으로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미 재무부가 채권을 대량 발행해 매수물량을 공급해줬기 때문인데 ECB는 이와 대비된다는 것이다. 모건스탠리 유럽지부의 앤서니 오브라이언도 "ECB가 QE 목표에 부합하는 국채를 충분히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나마 기존에 발행된 분트 역시 구하기가 쉽지 않다. 전 세계 분트 시장 규모는 약 1조1,000억유로에 달하지만 그 중 90%가량을 전 세계 주요 중앙은행들과 시중은행·보험사 등이 싹쓸이했다. 이들은 각각 환금 가능한 안전자산 확보와 자본규제, 투자 가이드 등 때문에 보유물량을 대거 내놓을 수 없는 처지다. 이 가운데 중앙은행들은 적정 외환보유액 포트폴리오 관리를 위해, 시중은행 및 보험사들은 적정 자본요건 규제를 충족하기 위해 안전자산인 우량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유로존의 다른 우량국채들 역시 이들 금융기관이 움켜쥐고 있다.
이처럼 수요가 몰리다 보니 독일은 물론 핀란드·오스트리아 등 주요 유로존 우량국가들의 국채상품 수익률은 줄줄이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특히 분트 5년물은 최근 사상 처음 마이너스로 하락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JP모건은 이달 초 보고서에서 현재 유로존 회원국 발행 국채(만기 1년 이상 기준) 중 마이너스 수익률 물건의 규모는 대략 1조7,000억유로에 달하고 전 세계적으로는 총 국채의 약 16%인 3조6,000억유로 상당의 물량이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면서 이들 물량에는 주로 중앙은행, 시중은행, 상장지수펀드(ETF)와 디플레이션 헤지투자자, 환차익 추종세력 등이 몰리고 있다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