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스티브 잡스 잠들다] "직관 따라 나아가라"… 죽음 앞에서도 혁신 이끈 'IT 선지자'

■ 인생과 철학 <br>"남 아닌 자신의 인생 살아라" 실패 두려워 않는 과감한 행보 <br>애플서 해고·췌장암 선고 등 고비를 되레 성공 발판으로


[스티브 잡스 잠들다] "직관 따라 나아가라"… 죽음 앞에서도 혁신 이끈 'IT 선지자' ■ 인생과 철학 "남 아닌 자신의 인생 살아라" 실패 두려워 않는 과감한 행보 애플서 해고·췌장암 선고 등 고비를 되레 성공 발판으로 유주희기자 ginger@sed.co.kr 지난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 지금도 시대의 명연설로 꼽히는 이 자리에서 스티브 잡스는 "남의 인생을 살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살라"고 강조했다. 이어 "언제나 더 나은 것을 갈망하며 앞만 보고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고 말했다. 잡스의 인생이 바로 그랬다. 언제나 돌진했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다 보면 언뜻 관계없어 보이는 '점(dot)'들이 이어져 하나의 일관된 선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두 번의 좌절을 겪었지만 애플뿐만 아니라 정보기술(IT) 업계의 '선지자(Visionary)'로서 세 번의 전세계적인 혁명을 이끌어내고 이 땅을 떠났다.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라="여러분의 심장과 직관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심장과 직관은 알고 있습니다. "(스탠퍼드 연설) 1955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젊은 대학원생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잡스는 바로 입양된다. 이후 잡스는 17세 때 입학한 리드대를 6개월 만에 스스로 그만뒀다. 배울 것이 없는데다 등록금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양부모가 애써 모은 돈을 모두 등록금으로 납부하는 것을 보면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대학 중퇴 후에도 잡스는 18개월 동안 캠퍼스에서 숙식하며 마음 가는 대로 수업을 청강했다. 당시 잡스는 숙소도, 생활비도 없어 빈 콜라병을 주워 팔고 주말마다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인도 사원의 무료 급식을 위해 걷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에 정말 행복했고 귀중한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 때 들은 서체(calligraphy) 강의다. 서체 수업은 잡스에게 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었고 이 기억은 십년 후 잡스가 첫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 때 되살아났다. 잡스는 "대학을 그만두지 않았으면 서체 강의를 청강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매킨토시나 이후의 컴퓨터들이 다양한 서체를 포용할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종 자신이 평생 한 결정 중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가 '대학 중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74년에는 비디오게임 회사인 아타리에 게임 디자이너로 취직했지만 몇 개월 만에 그만뒀다. 그리고 그는 '영적인 깨우침'을 위해 인도 여행을 떠났다. 우리나라에서였다면 대학 중퇴와 여행을 위한 퇴직이라는 경력만으로도 '낙오자'로 낙인 찍혔을 터였다. ◇시대의 흐름을 미리 읽은 '선지자' 잡스=인도여행에서 돌아온 잡스는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애플을 창업했다. 둘은 차고에서 첫 작품인 애플Ⅰ 컴퓨터를 만들었고 이후 애플Ⅱㆍ리사ㆍ파워북ㆍ매킨토시 등을 차례로 선보이면서 당시 거대기업이었던 IBM과 함께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만들어나갔다. 잡스와 워즈니악은 역할이 달랐다. 잡스는 부품 조달이나 제품 판매를 총괄하는 최고경영자(CEO) 기질을 갖추고 있었고 워즈니악은 타고난 엔지니어였다. 하지만 잡스는 단순한 CEO가 아니라 '보는 눈'을 갖춘 선지자이기도 했다. 1979년 실리콘밸리의 제록스 부설연구소를 방문했던 잡스가 그래픽사용자환경(GUI)의 진가를 알아보고 1983년작 '리사'에 적용한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GUI는 마우스로 아이콘을 클릭하는 등 현재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인터페이스로 당시의 컴퓨터는 오로지 텍스트로만 이뤄져 있었다. 잡스는 제록스 연구소에 거의 버려져 있다시피 했던 GUI의 가능성을 내다봤고 1990년대 중반까지 텍스트 위주의 '도스(Dos)' 운영체제를 고수했던 마이크로소프트(MS)'도 결국 윈도를 내놓으면서 GUI를 채택했다. 잡스는 또 지금 당장의 수요를 좇기보다 먼저 수요를 예측하고 때로는 수요를 만들어내는 데 능했다. 2001년 잡스가 아이팟을 들고 나왔을 때 여전히 '워크맨'의 신화를 믿고 있었던 소니는 "제조 능력이 없는 애플은 1~2년 내로 쫓겨날 것"이라며 애플을 우습게 여겼다. 2010년 출시된 아이패드는 심지어 아이폰 출시 이전부터 잡스가 구상해온 제품이었지만 초기에 '과연 누가 쓰겠느냐'는 비아냥을 들었다. 하지만 잡스는 누가 뭐래도 굴하지 않고 '아이(i)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 생태계는 지금 아이팟과 아이폰, 아이패드로 끈끈히 연결된 채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 ◇두 차례의 좌절, 잡스를 거인으로=두 차례의 좌절은 건방진 천재를 성숙시켰다. 잡스는 독선적이고 오만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잡스는 애플의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모든 일에 관여했다. 불행히도 그는 디테일에 강한 CEO였다.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면박을 줬고 엘리베이터에서 그와 마주쳤다 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직원은 곧바로 해고당했다. 1985년 잡스 자신이 펩시콜라에서 스카웃해온 존 스컬리 당시 애플 CEO가 거꾸로 잡스를 해고했을 때 아무도 그를 지켜주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제이 엘리엇 애플 전 부사장은 "잡스는 사내정치 등을 경멸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같은 실패는 잡스에게 약이 됐다.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잡스에 대해 "몇 세대에 한 번 나올 만한 천재"라며 "실패의 경험이 그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었다"고 표현했다. '구글드(Googled)'의 저자인 켄 올레타 뉴요커 수석 칼럼니스트도 "잡스는 실패를 경험한 덕에 구글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 래리 페이지를 압도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두 번째 좌절은 더욱 무서웠다. 아이팟으로 애플의 제2 전성기를 빚어낸 잡스는 2003년 췌장암 선고를 받았다. 잡스는 "언제든 죽음과 마주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의 기로에서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1년 후 죽음을 이기고 애플에 복귀한 잡스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스마트 혁명을 주도했다. 1980년대의 개인용 컴퓨터 혁명과 2000년대 초반의 아이팟 혁명에 이어 세 번이나 전세계적인 혁명을 이끌어낸 셈이다. [포토] 파란만장했던 스티브 잡스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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