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4년 초 미얀마 서부 해안. 바다 밑 3,000m를 뚫고 내려가도 예상했던 가스가 나오지 않자 포기할지 말지를 고민하던 직원들은 시추봉을 다시 비스듬히 뚫고 내려가다 진한 기름 냄새를 맡았다. 지난달 가스생산을 시작한 대우인터내셔널의 미얀마 광구 얘기다. 이 업체는 미얀마에 진출한지 무려 28년, 광구개발에 참여한지 13년 만에 상업생산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전세계가 끈기 있는 한국 민간기업의 성공사례에 감탄하고 있는 시점에 막상 한국 정부는 해외자원개발 사업에 대대적인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지난 5년간 에너지 공기업들이 추진했던 사업들은 모두 구조조정 대상에 올랐다. 자원개발의 내실을 다진다는 취지이기는 한데 모든 자원개발 사업은 이 여파로 내년까지도 올 스톱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의 냉온탕식 정책에 국가 생존이 달린 해외자원개발 사업이 흔들리고 있다. 신중하게 투자하고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이 핵심인 자원개발 사업이 정권 입맛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적당한 투자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 아마추어 행정에 자원개발 후진국이라는 오명도 벗겨지지를 않는다.
◇하베스트 쇼크에 발목 잡힌 해외 자원개발='유가가 하락한 기회를 활용해 유망기업을 인수합병(M&A)하고 생산광구를 인수한다.' 2008년 12월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가 '2009년 업무계획'을 통해 밝힌 해외 자원개발 전략이다. 정부는 이 무렵부터 높은 자주개발률 목표치를 제시하고 에너지 공기업들을 몰아붙였다. 2008년 이후 5년 동안 정부가 석유ㆍ가스 개발을 위해 투자한 금액이 유사 이래 총 투자액의 70%를 훌쩍 웃돈다. 그 대부분을 석유공사와 가스공사가 수행했다.
급속한 사업 추진은 외형을 키우기는 했지만 부작용도 낳았다. 일부 M&A가 커다란 손실로 돌아온 것. 석유공사가 섣부르게 인수한 캐나다 하베스트 유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 관계자는 "두바이유를 들여와 가격이 비싼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로 정제해 판다는 것이 사업 모델이었는데 셰일가스 여파로 WTI 가격이 하락하면서 사업에 완전히 차질이 빚어졌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규모 실패 사례가 나오자 화살은 공기업에 돌아갔다. 감사원과 기획재정부는 공기업에 집중포화를 퍼부었고 사장들은 옷을 벗었다. 이명박 정부 자원개발 사업의 한 핵심 관계자는 "공기업 입장에서는 정부가 설정한 자주개발률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M&A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며 "사실상 정부의 실패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인데 정부에서는 이를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냉ㆍ온탕 오가는 아마추어 자원개발 행정=문제점이 도출된 사업장을 정부가 나서서 조금씩 정리하고 새로운 전략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방식인데 5년 전 자원개발 사업에 대대적으로 뛰어들 때처럼 자원개발 구조조정도 너무 요란하다는 것이 문제다.
정부는 올해 초부터 정권 코드에 맞추기 위해 해외 자원 개발을 구조조정하겠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켰다. 이 과정에서는 각 공기업들이 어떤 사업장을 정리할 것이라는 얘기도 자연스레 흘러 나왔다. 자원개발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구조조정을 한다고 해도 몰래 해야 하는데 정부는 전세계에 우리가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떠든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실제 석유공사ㆍ가스공사 등 자원개발 공기업은 일부 핵심 사업을 매각하기 위해 해외 시장에 의사를 타진했으나 마땅한 매수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 윤상직 산업부 장관이 "자원개발 구조조정 대상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도 이 같은 부작용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공기업의 한 관계자는 "우리가 사업성이 안 좋아 팔려고 하는 사업을 해외 메이저 기업이 고분고분 사갈 리가 없다"며 "정부가 구조조정 성과를 내라고 독촉하면 공기업은 결국 사업성이 좋은 미래 사업을 팔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원개발은 생존 싸움…끈기 있게 밀어붙여야=우리나라는 세계 9번째 에너지 소비대국이면서 국내 소비 에너지원의 96%를 수입하는 나라다. 자원 가격의 변동이 심해지면 국가 경제가 존립하기 힘들어진다는 얘기다.
자원개발에 너무 조급증을 보이는 것도 문제지만 일부 사업이 잘못됐다고 자원개발 전체를 중단하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원개발 분야의 한 전문가는 "셰일가스 여파로 기존 해외 자원개발 사업들의 수익성이 악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셰일가스가 기존의 전통 자원을 결코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지금 투자해도 10년이 지나야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사업들이 수두룩한데 알짜 매물을 보면서도 아무도 사업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5년간 적극적인 자원개발 사업 추진과정에서 만들어왔던 해외 인적 네트워크를 잃어버리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성원모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는 "정부 정책이 일관성을 잃어버리면 우리 업체도 체계적인 기술력과 사업 능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다"고 말했다.
자원개발 업계는 정부가 탐사-개발-생산 단계별로 자원개발 포트폴리오를 올해 안에 명확히 다시 제시하고 긴 호흡으로 자원개발 사업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