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시론] 시장경제와 연고주의

LG경제연구원장 李 允 鎬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착을 가장 중요한 정책 과제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체제 가운데 가장 훌륭한 정치체제이자 경제체제이기 때문이다. 비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완전한 것은 아니라 아직은 이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 선진국들의 사례를 보아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얼마나 정착되었느냐의 여부가 선진의 정도를 가름하고 생활수준의 높낮이를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병행 발전하기 위해서는 특히 두 가지 기본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자유와 경쟁이다. 자유와 경쟁이라 해서 무제한의 자유, 무제한의 경쟁이 아니다. 남의 자유도 인정하는 개인의 자유, 공정한 규칙에 따르는 경쟁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에는 자유와 경쟁을 해치는 그래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발전을 저해하는 암적인 존재가 있다. 바로 연고주의(緣故主義)다. 돈을 매개로 형성되는 관계도 하나의 연고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에는 크게 네 가지의 연고가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 지연(地緣), 혈연(血緣), 학연(學緣), 금연(金緣)이 그것이다. 연고주의는 이미 우리 사회, 우리 문화의 중요한 한 모습이 되어 있으며 음으로 양으로 국민 생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물론 연고주의가 부정적인 측면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연고를 매개로 서로 상부상조하는 미풍양속의 맥을 잇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연고주의와 이로 인한 상부상조가 사적인 영역, 사적인 관계뿐만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 공적인 관계에까지 확대 적용될 때, 그 폐해는 연고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단연 압도하게 된다. 특히 권력과 연고주의가 결탁할 때 그 폐해는 국가 존립의 의의까지를 퇴색시킨다. 연고주의는 법 앞의 평등, 공정한 경쟁의 원칙을 깨뜨림으로써 연고없는 국민들의 자유를 상대적으로 제약하고 부정부패를 창궐하게 하며 소수인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원칙이 연고주의에 의해 깨진다면 사회 정의는 사라지고 자유 민주주의는 빈 껍질만 남게 마련이다. 유전무죄·무전유죄, 표적사정, 지역주의 등은 이러한 원칙이 훼손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연고주의는 공정한 경쟁을 해치고 정보의 흐름을 왜곡시키며 결국에는 자원배분의 왜곡을 초래한다. 가령 대출이나 국가 예산의 집행시 경제적인 우선 순위에 따라 자금을 배분하기보다 지연, 혈연, 학연으로 연결되거나 뇌물을 갖다주고 향응을 베푸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자원이 배분된다면 경제적 효율성과 경제정의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IMF사태를 맞게 된 데는 연고주의도 큰 몫을 담당했다는 판단이다. IMF사태를 불러온 원인으로는 기업들의 과투자·오투자, 금융시스템의 부실, 정부의 감독 부실과 정책실패, 국민들의 과소비와 사회전반의 거품현상, 그리고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정과 투기 자본의 급격한 이동 등이 거론되고 있다. 외부요인은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귀책사유가 있는 내부요인들의 저변에는 연고주의가 깊숙히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과 가치관, 그리고 문화를 고려할 때 연고주의를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또 가능하지도 않다. 연고주의는 사적인 영역에서 인연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돕는 아름다운 인간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며 또한 우리 나라의 부족한 사회보장 시스템을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고주의가 공적인 영역, 공적인 관계에까지 관행이라는 이름 하에 음으로 양으로 강하게 작용하면 작용할수록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멀어지게 된다. 물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도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극심한 빈부 격차, 부익부 빈익빈 현상 등은 절대적으로 수정과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지금은 특히 시장경제가 갖는 몰인간성(沒人間性), 몰연고성(沒緣故性)을 최대로 활용하여 우리의 커다란 약점인 연고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연고주의가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확실한 인식과 필요성이 국민들 사이에 확실히 자리잡을 때까지라도 시장경제는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최근 시장경제가 너무 매몰차고 무자비하다는 비판을 배경으로 「제3의 길」등 시장경제에 대한 대안이 논의되고 있으나 인간적인 면, 따뜻함을 강조하는 이러한 주장은 연고주의를 청산해야 할 우리에게는 시기상조가 아닐까 싶다. IMF사태를 초래하게 된 근본원인 중의 하나가 연고주의라는 것을 인정한다면IMF사태의 극복은 연고주의 극복과 직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우리는 IMF이전에 비해 과연 얼마나 연고주의를 극복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진솔하고 심각하게 물어보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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