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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해도 꿈쩍하지 않던 냉전시대의 유산인 미국과 쿠바의 적대관계가 18개월간의 극비회담 끝에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됐다.
플로리다 해협을 두고 불과 145㎞ 떨어져 있는 미국과 쿠바의 적대관계는 냉전시대 이념대립의 발화점이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체게바라와 함께 쿠바 수도에 혁명정부를 세운 뒤 미국 기업들의 재산을 국유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 1961년에 양국의 국교는 단절됐다. 이후 미국은 쿠바와의 인적·물적 교류를 차단하는 것은 물론 국제기구에서 쿠바를 축출하고 다른 국가에도 외교단절을 압박하는 봉쇄정책으로 일관했다.
17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TV 생중계 연설을 통해 쿠바에 대한 봉쇄정책은 실패했다며 국교 정상화를 선언했다. 냉전시대의 유산을 끝내겠다는 그의 발표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 중 대부분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에서 비롯된 강경 노선을 넘어서야 한다"며 "쿠바를 붕괴로 몰아가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도, 쿠바 국민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 언론들은 이번 조치가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중국과의 수교, 1995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베트남과의 국교 정상화와 맞먹는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의 외교전략 변화는 오바마 대통령의 '개방 외교'에 따른 것으로 평가된다. 효과는 없고 오히려 미국의 외교적 수단만 제한시키는 봉쇄전략은 버릴 때가 됐다는 게 오바마 대통령의 입장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TV 생중계 연설에서 "우리 중 대부분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에서 비롯된 강경 노선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쿠바를 붕괴로 몰아가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도, 쿠바 국민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어떤 나라를 실패한 국가로 몰아붙이는 정책보다 개혁을 지지하고 독려하는 것이 더 낫다는 교훈을 어렵게 얻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오바마 대통령의 선택은 임기 후반 '식물 대통령' 대신 정치적 유산(legacy)을 남기기 위한 승부수로 해석된다. 그는 최근 11·4 중간선거에 참패한 후 이민개혁 행정명령 발동, 공화당 집권 시기에 자행된 미 중앙정보국(CIA) 테러 용의자 고문실태 공개 등 과감한 정치적 행보에 나서고 있다. 외교 분야에 있어서는 전임 정권에서 벌여온 2개의 중동전쟁(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식을 업적으로 내세웠지만 최근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세력확대로 중동정책 실패에 대한 비난이 거셌다. 그러나 그는 이번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로 미국 외교사에 남을 만한 업적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사설에서 "단계적이고 온건한 조치를 취하는 대신 오바마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과감하게 나갔다"고 호평했다.
국내 정치에 있어서도 득이 크다. 200만명에 달하는 미국 거주 쿠바인과 쿠바계 후손들이 2016년 대선에서 민주당 우군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공화당이 강력히 반발하는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존 베이너 공화당 하원의장은 "잔인한 독재자에게 어리석은 양보를 해준 또 하나의 사례일 뿐"이라고 반발했다. 공화당은 새해에 시작되는 새 의회에서 상하원 양원 다수당의 지위를 이용해 국교 정상화 조치에 제동을 걸겠다는 입장이다. 쿠바 출신인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도 "백악관이 얻은 것은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을 쿠바에 양보했다"고 비판하면서 주쿠바 미국대사관 개설 및 대사 임명에 반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경제봉쇄 해제는 대부분 행정조치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어서 공화당이 실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한편 미국이 이란 핵협상 타결에 이어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를 선언하면서 대북관계 정상화 여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이 최근 미국인 억류자 3명을 석방한 것으로 계기로 양국 간 관계가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북한과 쿠바는 다르다는 게 미국 내 시선이다. 핵 개발과 인권 문제에 있어 북한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다른 '적성' 국가의 선례를 따르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