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심층진단] "지원하랄 땐 언제고"… 고무줄 충당금 지시에 금융사 냉가슴

■ 질척거리는 기업 구조조정<br>"자율협약 실효성 사라져"<br>채권단, 당국에 불만 토로<br>정상화 길 바쁜 기업만 오락가락 정책에 골탕


부실채권 분류를 놓고 감독당국과 금융회사가 벌이는 싸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자율협약을 맺고 구조조정을 추진 중인 기업 여신의 등급을 둘러싼 논란이 주로 은행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저신용기업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저축은행과 캐피털 등 제2금융권도 감독당국과 부실채권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부실채권 싸움은 은행의 건전성을 따질 수밖에 없는 감독당국과 수익성을 고려해야 하는 금융회사 사이에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해묵은 싸움 때문에 구조조정 중인 기업에 제때 필요한 신규 자금이 공급되지 못하고 기업들만 골탕 먹을 수 있다는 점은 반드시 따져볼 문제다.


◇'지원하라고 강압해 놓고'…자율협약 전제가 무너진다=채권단이 금감원의 부실채권 분류 지시에 반발하는 이유는 여기서 물러나면 앞으로 자율협약의 실효성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금융당국에 대한 배신감마저 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자율협약의 기본 취지는 채권단이 공동으로 구조조정 기업의 지원 방안을 만드는 것. 말 그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채권단의 '자율'이다. 법률에 따라 진행되는 법정관리나 워크아웃과 달리 여신 건전성 판별에 있어서도 자율협약은 채권단에 자율성을 보장해왔다.


그런데 금감원 방침대로 자율협약 기업의 채무재조정에 대해서도 여신을 '고정이하'로 분류할 경우 자율협약이 가졌던 장점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채권단은 법정관리나 워크아웃으로 보내는 것보다 경영정상화와 채권회수 가능성이 큰 기업에 대해서 자율협약을 추진한다. 해당 기업의 여신을 정상범주에 속하는 '요주의'로 분류해놓으면 채권단은 충당금 적립과 부실채권 비율 상승 부담을 줄일 수 있어 좋고 구조조정 기업 역시 당장은 어려워도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히는 것을 피할 수 있어 정상화 작업에 속도를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채권단의 관계자는 "워크아웃 기업도 아니고 회생 가능성이 높은 기업을 채권단이 자율협약을 통해 살리려고 하는데 신규자금 지원까지 부실채권으로 보는 것은 경직된 감독 방침"이라면서 "이렇게 되면 자율협약의 틀이 지속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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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은행도 피해갈 수 없는 부실채권 싸움=부실채권 분류를 놓고 감독당국과 업계가 벌이는 싸움은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에서 극심하게 벌어져왔다. 채권분류에 따른 대손충당금 적립 규모는 저축은행 손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저축은행은 감독당국이 지나치게 채권분류를 엄격하게 하면서 생사의 기로에 서고는 했다. "분류 기준을 느슨하게 했다가 문을 닫으면 책임을 감독당국이 뒤집어쓴다"는 일종의 보신주의가 작용하고 있는 것.

금융계 관계자들은 저축은행 트라우마에 빠진 감독당국이 부실 방지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저축은행의 '고정 이하' 부실채권 분류를 시중은행에 비해 엄격하게 한다고 보고 있다.

실제 중소기업 대출의 일종인 개인사업자 대출 비중이 높은 저축은행에 대해 금감원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도 한다. 금감원은 최근 한 저축은행 검사를 하면서 개인대출에 대해 "재무제표를 받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해당 저축은행의 관계자는 "법인도 아니고 저축은행을 거래하는 개인사업자들에 재무제표가 어디 있냐"면서 "결국 지난 감독당국의 검사∙감독 방침에 서민들만 피해를 입는 꼴"이라고 말했다. 일부 저축은행은 최근 금융당국에 자산건전성 분류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부실채권 싸움, 애꿎은 기업 피해는 막아야=최근까지 순항 중이던 채권단의 STX그룹 구조조정 작업은 감독당국과 채권단의 부실채권 분류 갈등이 불거지면서 지연되고 있다. 지난 7월 중순 경영 정상화 방안을 마련해놓고 양측 간 입장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약 3조원에 가까운 신규 자금 투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STX조선의 정상화 작업이 늦춰지면서 STX중공업∙STX엔진∙㈜STX 등 다른 계열사의 경영 정상화 작업도 늦춰지고 있다. 해묵은 부실채권 싸움에 구조조정 기업들이 피해를 입는 사례가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워크아웃과 기업 정상화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면서 회생절차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쌍용건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쌍용건설 채권단은 6월 중순 상장폐지 유예 만료 시한을 불과 2주 남기고 워크아웃을 개시했다. 신규 자금 4,450억원, 출자전환 1,070억원, 해외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 보증 2.400억원 지원 방안에 동의했지만 금융당국과 채권단의 갈등으로 회사 경영은 이미 악화된 상태다.


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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