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클릭 이 판결] <15> ELW 스캘퍼 사건

증권사에 '속도차이 두면 안된다'는 법적 의무 없어

"빠른 주문 시스템, 부정행위 아니다"

"스캘퍼 처벌은 혼란 가중·기술 위축시켜" 판결

고빈도거래 또는 초단타매매로 해석되는 HFT(High Frequency Trading)는 올 상반기 미국 월가를 가장 뜨겁게 달군 이슈 중 하나였다. 촉매제는 금융인 출신 베스트셀러 작가인 마이클 루이스가 출간한 '플래시 보이즈: 월가의 반란'이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이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은행과 헤지펀드 등의 고빈도거래 수법을 상세히 밝히며 이들이 다른 시장참여자에게 손해를 끼치며 부당 이득을 챙기고 시장 자체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HFT란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한 자동매매 기법(알고리즘 매매)을 통해 초당 수백, 수천 번의 대규모 거래를 하고 차익을 얻는 거래방식을 말한다.


'1,000분의 1초' 승부라고도 불리는 HFT의 불공정 거래 가능성에 대해 우리나라는 한발 앞서 주목했다. 지난 2011년 여의도 증권가를 뒤흔들었던 '스캘퍼(초단타투자자) 사건'에서다.

2011년 6월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는 ELW(주식워런트증권) 시장에서 스캘퍼에 특혜를 제공한 혐의로 12개 증권사 전·현직 대표이사를 포함해 업계 관계자 30명과 스캘퍼 18명 등 총 48명을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스캘퍼들은 HFT 방식을 활용해 국내 ELW 시장의 구조적 허점을 파고들었다. 국내 ELW 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호가를 제시하는 '유동성 공급자(LP·증권회사가 담당)'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다수 간 매매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일반 유가증권 시장과 달리 ELW 시장의 가격은 대부분 LP에 의해 결정됐다. 딜러 역할을 하는 LP가 부르는 가격에 따라 ELW가 사고 팔렸고 실제 당시 총 거래대금의 97% 가량이 LP와 개인투자자간 거래였다.

LP는 장중 ELW 기초자산 가격 변동에 따라 매도·매수 호가를 산정해 제시했는데 이때 가격은 '블랙-숄즈 모형'이라는 가격 결정모델에 기초한 컴퓨터 프로그램에 따라 자동으로 계산됐다.

그런데 LP가 호가를 다시 제시하는 경우 이 가격이 거래소로 제출되기까지는 '0.01~0.05초'라는 아주 짧은 시간적 틈새(LP 지연효과)가 발생했다. 만약 LP가 호가를 올릴지 내릴지를 먼저 알아채 LP보다 더 빨리 거래할 수 있다면 어떨까. 스캘퍼들은 LP가 호가를 높이기 위해 가격을 거래소에 제출한 순간 LP보다 더 빠른 속도로 주문을 내 가격을 올리기 전 기존 호가 물량을 매수하고 LP가 호가를 내리려는 순간 LP보다 빨리 하락 전 호가로 물량을 매도하는 방식의 알고리즘을 짜 초 단위로 대량의 거래를 하며 막대한 매매 차익을 얻었다.

이러한 수법이 성공 열쇠는 빠른 속도였다. LP 지연효과가 발생하는 '0.01~0.05초' 동안 자신의 주문을 LP보다 먼저 거래소에 도달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스캘퍼들은 더 빠른 거래 속도를 제공해주는 증권사들을 찾아 나섰고, 증권사들은 스캘퍼들이 지불하는 억대 수수료 수입과 시장 점유율 상승효과를 기대하며 속도 경쟁에 가세했다. 증권사들은 스캘퍼 전용회선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가공되지 않은 시세정보를 일반 투자자보다 우선해 제공했다. 심지어 사무실이나 시설의 임대 수수료를 내주기까지 했다.

검찰은 증권사와 스캘퍼 사이의 이 같은 부적절한 '공생관계'로 인해 2009년 ELW 일반 개인투자자들이 4,143억원의 손실을 보는 동안 스캘퍼들은 1,000억원 이상의 이익을 누리고 증권사 역시 수백억원의 수수료를 벌어들였다고 지적했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증권사들이 제공한 속도 관련 서비스들이 과연 자본시장법상 '부정한 수단'에 해당하는 것일까. 둘째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다른 투자자들이 이익을 볼 기회를 빼앗는 것일까.


기소 5개월 만인 2011년 11월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김형두 부장판사)는 노정남 대신증권 전 대표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167쪽에 이르는 판결문을 통해 ELW 시장의 특성과 스캘퍼의 수법, 이 수법이 다른 시장 참여자들의 기회를 박탈한 것인지에 대해 조목조목 따졌고 결국 이들에 죄를 묻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올해 초 대법원 확정판결로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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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증권사에 '주문 처리 과정에서 속도 차이를 두면 안 된다'는 법적 의무가 없으므로 빠른 주문 시스템은 현행법상 '부정한 수단, 계획, 기교를 사용한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증권사가 소수 스캘퍼들에게만 빠른 주문 시스템을 비밀리에 제공했다고 보기도 어려우며 이 같은 서비스를 공시할 의무도 없었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이어 "스캘퍼가 이익을 보고 일반투자자들이 손해를 봤다고 해도 각자 LP와의 거래에서 이익과 손해를 본 것일 뿐"이라며 "스캘퍼들의 매매전략은 인간의 지각 능력을 이용하는 투자자들은 할 수 없는 방식이며 따라서 일반투자자들의 거래 기회를 박탈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덧붙였다.

특히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사용된 거래 방식의 불공정 가능성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했다. 재판부는 "증권사가 스캘퍼들에 특혜를 제공한 것은 이들이 '우수 고객'으로 많은 수수료를 지급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고 스캘퍼들 역시 증권사들로 받은 서비스들을 기반으로 일반투자자들이 막대한 손실을 기록하고 있는 ELW 시장에서 이례적으로 높은 수익을 얻은 것은 사실"이라고 전제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러한 요소들이 일반투자자들의 법감정을 해한다는 취지로 주장하지만 증권사의 주문 속도를 일치시킬 기술적인 방법조차 없는 상황에서 이 사건과 같은 행위를 처벌하고자 하는 것은 형사처벌의 영역을 너무 확대함으로써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고 기술을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를 해결할 가장 합리적인 접근방식은 금융 감독기관의 검토에 따른 정책적·행정적 규제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용어 설명>

▲스캘퍼(scalper)

증권시장에서의 초단타 매매를 일컫는 말. 북중미 인디언들이 적의 머리 가죽을 벗겨 전리품으로 챙겼던 행위(scalping)에서 유래됐다. 미국 증권법에서 스캘핑은 투자자문업자가 매수 추천 전에 해당 증권을 먼저 매수하거나 매도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불공정 행위를 말하며 법적으로 금지된 행위를 뜻한다.

▲고빈도거래(HFT·High Frequency Tradin)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한 자동매매 기법(알고리즘 매매)을 통해 초당 수백, 수천 번의 대규모 거래를 하고 그에 따라 차익을 얻는 거래방식

▲주식워런트증권(ELW)

만기에 행사가격으로 기초 자산을 사거나 팔 수 있는 권리를 증권화한 파생상품. 옵션과 비슷한 성격을 가졌지만 거래소에 상장돼 일반 유가증권처럼 거래된다. 레버리지 효과가 커 소액으로 높은 수익률을 올리고자 하는 개인투자자에게 인기를 끌었고 지난 2010년에는 거래량 기준으로 홍콩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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