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과 실리콘밸리 정보기술(IT) 공룡 기업들이 데이터를 둘러싼 신종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구글 등 미 IT 기업들에 대한 각종 규제의 명분으로 개인 사생활 보호, 반독점 및 경쟁 촉진, 저작권 보호, 탈세 철퇴 등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미래 산업의 새로운 원유'로 떠오른 인터넷 데이터 주도권 경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유럽 국가들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자국 벤처 산업을 초토화시키는 것은 물론 장기적으로 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경쟁력도 위협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유럽으로 진출하는 IT 공룡들= 현재 애플·아마존·페이스북·구글·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의 IT 기업 5개의 시장 가치는 1조8,000억 달러로 유럽의 최대 경제국 독일 DAX 지수에 포함된 우량 기업 30개를 합친 시가총액 1조3,000억 달러를 훨씬 웃돈다. 더구나 실리콘밸리 업체들이 인터넷 지배 권력을 등에 업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 해외 진출을 가속화하면서 유럽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가령 차량 공유 서비스를 제공하는 '우버'가 현재 전세계 51개국의 230개 도시에 진출한 반면 비슷한 서비스 업체인 영국의 '하일로'는 최근 우버를 이길 수 없다고 보고 미국 진출을 포기한 게 단적인 사례다. 영국 일간 텔레그라프는 "글로벌 택시 공유 시장의 최종 승자는 결국 구글 검색에 기반한 우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장가치도 우버가 400억 달러로 평가되는 반면 하일로는 7,710만 달러에 그친다.
실리콘밸리 업체들의 공격적인 진출에 보다폰 등 유럽 통신사들의 반감도 커지고 있다. 인프라 확충 등 부대 비용이 커진 반면 구글·아마존·페이스북 등은 이에 기생해 단물만 빼먹고 있다는 것이다. 텔레그라프는 "자본만큼 중요한 데이터를 놓고 미국과 EU간의 새로운 종류의 무역 전쟁이 발발 직전"이라고 전했다. 미 기업들이 유럽 고객들의 데이터를 활용해 시장을 좌지우지하자 유럽 정책 당국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하다. 더구나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유럽 성장 둔화로 세수가 위축되는데도 소매·미디어 등 다양한 산업에서 거둔 수익을 미국으로 가져가는 한편 각종 편법을 통해 세금까지 회피하고 있다.
특히 IT에 이어 자동차 등 핵심 산업이 다음 제물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BMW 등 유럽 자동차 제조사는 스마트 자동차 운행을 위해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려 하지만 구글이 더 나은 네트워크를 개발할 경우 압도당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통신사들도 기존의 시설을 이용해 값싸면서도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바일 메신저 앱인 왓츠앱의 도전을 받고 있다. 영국의 워윅대 경영대학원의 폴 스톤먼 명예교수는 "유럽인들이 미국 IT기업 부상으로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유럽, 실리콘밸리 기업 맹폭= 실리콘밸리의 공세에 맞서 유럽도 전방위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최우선 타깃은 유럽 인터넷 검색 시장의 92%를 장악하고 있는 구글이다. 유럽 규제 당국은 지난해 11월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와 관련한 개인정보 삭제 조치를 유럽에 이어 전세계로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유럽의회도 구글 검색 서비스 분할 결의안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통과시켰다.
유럽 각국은 구글의 수익 구조도 정면 겨냥하고 있다. 독일은 검색 때 구글의 자사 서비스가 우선적으로 나오지 않도록 구글을 '중립적인 검색엔진'으로 만드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지난 10월 스페인은 검색된 뉴스에 저작권 사용료를 내라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독일도 뉴스 링크 등 일부 예외 조항은 뒀지만 비슷한 법안을 마련 중이다. 유럽의 역공은 다른 실리콘밸리 업체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 런던, 베를린, 파리, 마드리드, 밀라노 등 주요 도시들은 '우버' 영업을 잇따라 불법화했다.
아울러 미 IT업체들의 편법적인 절세 관행에도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영국의 경우 다국적 기업의 조세회피를 막기 위해 자국에서 발생한 이익을 다른 나라로 이전할 경우 이전액의 25%에 해당하는 세금을 물리는 이른바 '구글세'를 오는 4월 도입할 예정이다. 또 EU는 아마존 유럽 사업부에 대해 지난 10월부터 공식적인 탈세 조사에 착수한 상황이다.
아일랜드도 EU의 압력에 못 이겨 구글·페이스북·애플 등 다국적 기업에 제공하던 편법적인 절세 시스템을 2020년까지 폐지하기로 했다. 이처럼 유럽의 규제 리스크가 커지자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메를린치는 지난달 구글 주식 투자 비중을 낮추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세계를 향한 실리콘밸리의 진군이 유럽에서 심각한 저항에 직면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