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자업체 도시바가 SK하이닉스를 상대로 1조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도시바의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기술이 SK하이닉스로 유출됐다는 이유에서다.
한국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밀리며 몰락한 '가전왕국' 일본의 전자업체들이 한국 업체들에 대한 견제를 본격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14일 외신 및 관련 업계에 따르면 도시바는 SK하이닉스가 자사의 낸드플래시 메모리 기술을 무단으로 취득, 사용해 1,000억엔(약 1조원) 이상의 피해를 봤다며 도쿄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또 도시바와 업무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 반도체업체 샌디스크도 이날 SK하이닉스를 상대로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도시바 측은 제휴업체인 샌디스크의 일본 법인에 근무하던 직원이 도시바의 낸드플래시 메모리 대용량화 기술 정보를 무단으로 빼낸 뒤 지난 2008년 SK하이닉스로 이직해 관련 정보를 넘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직원은 2011년께 SK하이닉스에서 퇴직했으며 현재 일본 경찰에 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다.
이와 관련, SK하이닉스의 한 관계자는 "아직 일본 법원으로부터 소장을 전달받지 못해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소장을 전달받은 뒤 대응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련 업계에서는 도시바와 SK하이닉스의 관계를 고려할 때 도시바의 이번 소송은 이례적이라고 보고 있다. 도시바가 SK하이닉스와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인 'STT-M램'을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는데다 2007년 플래시 메모리 기술을 서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크로스 라이선스(특허 공유) 계약도 맺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이 같은 관계에도 불구하고 도시바가 SK하이닉스를 상대로 소송을 앞세운 전면전을 선포한 것은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여가는 한국 업체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했다는 게 국내 업계의 시각이다. 도시바는 "SK하이닉스와 제휴 및 거래 관계에 있는 반면 낸드플래시 분야에선 경쟁하는 사이"라는 입장이다.
도시바는 낸드플래시 원천기술을 보유한 업계 최강자였지만 지난 2002년 삼성전자에 추월당한 뒤 지금까지 업계 2위에 머물고 있다. 지난해 3·4분기 기준으로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점유율은 삼성전자가 36.8%로 1위고 도시바가 33.5%로 2위,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러지(15.3%)와 SK하이닉스(14.3%)가 각각 3, 4위를 차지하고 있다. 낸드플래시와 메모리 반도체의 양대 축을 이루는 D램 분야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2개 업체가 세계 시장의 3분의2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도시바는 2001년 D램 가격 폭락 사태로 D램 사업을 접은 뒤 낸드플래시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반도체업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1990년대까지 세계 반도체시장을 주름잡던 일본 업체들이 한국 업체와의 경쟁에서 밀리며 실적이 악화되자 소송 등을 통해 한국 업체에 대한 발목 잡기에 나선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도시바가 기술 유출을 주장하는 낸드플래시 메모리는 D램과 달리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를 그대로 저장할 수 있어 스마트폰 등 모바일기기의 저장장치와 차세대 저장장치로 불리는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등에 주로 쓰인다. 낸드플래시 시장규모는 2013년 258억달러에서 2014년 268억달러, 2015년 284억달러로 예상되는 등 D램보다 빠른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