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반이었다. 필자는 미주이민 백년사를 소설로 쓰기 위해 이민들의 발자취를 더듬기로 했다. 일찌감치 이민을 떠났던 후배 K가 내 취재망을 커버해주기 위해 특별휴가를 내놓고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그가 들려준 얘기 중에 충격적인 대목 하나가 있었다.슈퍼마켓에 흑인강도가 든다. 용감한 한국인 주인은 자위책으로 그를 쏜다. 현장검증차 백인경찰이 들른다. 흑인의 숨결이 아직 붙어있자 백인경찰은 떨고 선 한국인 주인의 총을 빼앗아 흑인의 숨통을 끊어 놓는다.
『이녀석들 골치덩어리요. 전과 10범이란 말씀이야, 이참에 아예 없애버리는게 낫소. 법정에 섰을 때 당신이 정당방위로 쏘았다고 증언하시오.』
과연 강도가 백인이었더라도 경관의 태도는 여전했을까. 백인우월주의의 한 단면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사건은 10년뒤 LA폭동이라는 또다른 양상으로 터져흑인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바로 흑인청년 로드니 킹이 백인 경찰관들에게 무자비하게 폭행당한 사건이다. 흑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은 구타 경찰관 4명 모두에게 배심원 12명이 무죄평결을 내린데에 있다. 킹사건 직후 한국 식료품상 여주인이 15세 흑인소녀가 물건을 훔쳤다해서 사살한 사건이 발생하고 폭동때 한국계 가게들이 보복 습격을 당하는 사태로 이어진다.
필자가 후배 K와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네바다 리노의 언덕빼기를 넘던 때는 겨울이었다. 그런데 일기예보를 듣지 않고 눈길을 달리던 우리는 그만 폭설 속에 갇히고 말았다. 지옥의 문턱같은 눈더미 속에 갇혀 질식해 죽든가 얼어죽든가는 시간문제였다.
우리가 이승살이와 작별기도를 올리고 있던 바로 그때 백인청년 하나가 체인을 어깨에 메고 눈의 파도를 헤치며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승용차에다 철커덕 고리를 걸더니 안전지대까지 무사히 끌어다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도대체 그는 이 눈의 허허벌판에 어떻게 나타났을까. 우리는 그가 천사인 것을 확신했다.
노근리사건에 희생당한 우리 양민들은 억울하다. 그러나 모든 미국인은 악인은 아니다. 모든 백인이라고해서 악인만은 아니다. 모든 흑인이라고 해서 학대받는 선인은 아니다. 노근리사건에 대해서도 맹목적인 반미감정을 가질게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냉정하게 정리해서 판단할 일이다. 미국을 변명해주자는 뜻이 결코 아니라 기왕의 사건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미국은 복잡한 인종들이 모여 복잡하게 살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김병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