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드넓은 러시아 대륙에 주차타워 수요가 있다는 어느 무역관장의 발표는 마치 북극에 냉장고를 팔겠다는 것만큼 현실성 없게 들렸다. 그런데 최근 시베리아 등 러시아에서 늘어나는 실내주차 시설에 대한 수요를 현지 무역관에서 발굴해 우리 중소기업이 진출하도록 지원, 이미 적잖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새로운 수출 먹거리를 창출하기 위해 열심히 뛰는 모습이 대견했다.
지난주 러시아로 출장을 다녀왔다. 최근의 수출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CIS 지역 무역관장들과 대책회의를 하러 비행기에 오르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CIS 지역은 올해 우리 수출이 가장 고전하는 곳으로 1~5월 실적이 전년보다 무려 58.1%가 줄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로 바이어 이탈이나 구매 연기도 우려됐다. 그동안 러시아와 거래하는 수출업계들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서방의 경제제재, 국제유가 하락으로 러시아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우리 수출기업들의 피해도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특히 루블화 가치의 폭락으로 거래 중단이나 물품대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다행스럽게도 현지에서 접한 러시아 경제는 차츰 안정세를 회복하는 듯했다. 이런 기대감으로 '위기 속의 기회'를 발굴하느라 머리를 맞댔다. 러시아가 추진 중인 수입대체산업 육성정책(산업용 기계 등 18개 분야에 대한 설비투자시 세제 혜택 등 지원)을 우리 기업이 현지에 진출하는 호기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은 시의성이 있어 수출품목을 다변화하는 기회로 삼으면 좋을 것 같았다.
서방의 경제제재로 인한 대체시장을 우리 기업의 진출기회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흥미로웠다. 러시아 사람들은 중국에 대해 경쟁국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일본은 서방의 경제제재에 동참하는 파트너로서 부적합하다고 여기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 기업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따라서 의료와 농식품 등 우리가 강점을 갖춘 분야를 공략하면 수출성과 창출의 효과가 클 것 같았다.
이번 회의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이삭줍기의 심정으로 아이디어를 내면서 수출부진을 타개하려는 의지가 역력했다. 다만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해 장기적인 방향성을 소홀히 하면 안 되므로 현지의 사업을 발굴할 때는 득이 되는 분야를 정한 다음 큰 그림 속에서 사업을 추진할 것을 주문했다.
일례로 러시아가 주도한 유라시아경제연합(EEU) 출범은 우리 기업의 투자진출을 확대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런데 현지에 진출한 생산법인들이 오히려 경쟁력을 상실해 부메랑이 돼 돌아오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장기적인 발전방안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최근 들어 러시아 기업인과 정부 관계자들은 "한국에 기회가 왔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기회는 위기의 가면을 쓰고 온다고 했던가. 전례 없이 혹독한 시련을 겪은 우리 기업들이 이제는 가면 뒤에 감춰진 기회를 찾으면 좋겠다. 위기 끝에 다가올 기회를 선점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