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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X팬오션은 STX그룹 구조조정의 중요한 열쇠 중 하나였다. 산업은행이 일찌감치 팬오션 인수의 백기사로 나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수작업이 진행될수록 틀이 깨졌다. 부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자 산은마저 인수를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법정관리행을 눈앞에 두게 됐다. 이는 다시 말해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STX그룹의 구조조정 전반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당초 STX그룹은 채권단과 STX조선해양ㆍSTX중공업ㆍSTX엔진 등에 대한 자율협약을 맺고 구조조정을 추진, 그룹을 조선업 중심으로 재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궤도수정이 불가피하고 무엇보다 STX팬오션 인수 불발로 STX그룹은 현재 추진 중인 해외 계열사의 조기 매각이 실패할 경우 또다시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처할 상황이 됐다.
일단은 자율협약이라는 어정쩡한 형태의 구조조정 틀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 해외 계열사 매각작업 등이 여의치 않을 경우 그룹 전체가 워크아웃에 들어가거나 계열사 일부가 추가로 법정관리행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다.
◇한계 다다른 STX팬오션…산은도 지쳐가나=STX팬오션은 1∙4분기에만 당기순손실 715억원을 기록했는데 특히 영업활동으로 인한 현금흐름이 -369억원이었다. 이 때문에 연초 1,600억원이었던 현금성 자산도 3월 말 기준 762억원으로 반토막 났다. 사선(社船∙회사 소유 선박)을 베이스로 한 장기운송계약과 달리 2008년 금융위기 이전 해외 선주들로부터 고가로 빌린 장기용선계약이 계속 회사 수익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산은은 5월 실사 결과가 나온 직후 회사 측에 줄기차게 장기용선 부실 문제를 해결하라고 압박해왔다. 하지만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로 협상력이 없던 STX팬오션이 해외 선주들과 장기용선 재협상을 나서는 것은 무리였고 이 때부터 산은이 사실상 인수를 포기하고 법정관리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됐다. 인수해도 현금창출능력이 부족해 자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얘기다.
◇커진 해외 계열사 매각 부담…벼랑으로 몰리는 그룹 구조조정=STX그룹은 해운사인 STX팬오션이 STX조선에 선박을 발주하고 STX조선해양은 STX중공업ㆍSTX엔진으로부터 선박용 엔진과 기자재 등을 공급 받아 선박을 건조하는 수직계열화 체제다. 하지만 팬오션이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선박 건조대금에 대한 지급이 제때 이뤄지기 어려워진다. STX조선에 발주한 선박들의 정상적인 건조가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STX조선이 팬오션 등으로부터 수주한 선박을 채권단 지원 아래 건조해 현금을 확보한 후 정상화 기틀을 다진다는 구조조정 계획이 심각하게 꼬인다. STX팬오션이 STX조선해양에 발주한 선박만도 20척을 넘는다.
당초 STX팬오션을 제3자 매각 또는 산은 인수를 통해 유동성을 확보하려던 STX그룹은 팬오션이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해외 계열사 매각에 더욱 부담을 갖게 된다. 현재 STX그룹은 중국 STX다롄을 비롯해 STX핀란드ㆍSTX프랑스 등 유럽 조선소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국외 조선소 매각으로 최대 2조원을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팬오션 매각이 실패한 것처럼 해외 계열사 매각작업이 조기에 이뤄지지 못하면 그룹은 또다시 유동성 위기에 시달려 정상화에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 있다. 계열사 전체 구조조정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는 얘기다.
◇강덕수 회장의 거취는=STX 채권단은 자율협약을 신청한 계열사에 대한 실사 결과가 나오면 경영부실의 책임을 물어 감자를 단행할 방침이다. 채권단은 "정상화에 필요하다면 기존 오너의 도움을 받아 조속히 정상화해야 한다"고 밝혀왔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론이다.
채권단이 감자 후 출자전환의 수순을 밟게 되면 채권단이 주요 주주가 되고 강 회장 지분은 크게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경영권은 유지할 수 있겠지만 기존 오너의 지위를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금호아시아나 등 다른 기업의 구조조정에서도 있었던 관행이다.
강 회장도 이런 흐름을 알고 있는 듯 최근 "STX의 현 지배구조인 지주회사체제는 신속한 경영정상화는 물론 효율적인 구조조정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며 채권단과 금융당국에 그룹의 지배 틀을 흔들지 말아달라고 촉구했다. 채권단의 감자 등으로 그룹 지배구도를 잃더라도 지주사 해체를 통한 그룹의 공중분해만은 막아달라는 요구다. 하지만 이런 희망은 구조조정의 속도와 방식이 당초 계획대로 이뤄진다는 전제 아래 가능하다. 해외 매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믿었던 산은마저 등을 돌린다면 강 회장이 일궈온 사업 기반 자체는 송두리째 허물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