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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관 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한 때 전통음악인 ‘국악’이라는 용어가 논란거리가 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의 잔재라 하여 다른 말로 바꿔야 한다는 게 논지였다. 국악이 ‘한국음악’의 준말이 아니라 ‘신일본국민음악’의 준말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의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나라를 지칭할 때 ‘국가’라고 하고, 우리말을 ‘국어’, 우리 민족의 역사를 ‘국사’라고 하듯이 우리의 전통음악을 ‘국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선택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국악의 멋, 국악의 맛, 국악의 흥
국악의 멋, 맛, 흥은 어디에 있을까? 헛기침도 제대로 못하고 거의 부동자세로 앉아서 듣는 고전음악 연주회가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 판소리를 예로 들어보자.‘얼씨구’‘잘한다’‘좋다’라면서 추임새를 넣으며 연주자와 어울려 자유롭게 듣는 우리 음악은 어깨춤이 절로 나고 흥에 겹다. 나의 친한 벗 중 한 사람은 우리 음악의 매력을 느낀 후 부터는 노랑머리 가발을 쓰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가사로 노래하는 오페라공연의 관람을 단념했다고 한다.
정지된 것 같은 움직임 속에서 곡선을 그리는 우리의 춤은 서양 발레의 직선적인 빠른 동작에서 느끼지 못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런 매력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고전음악 연주회에서 흘려본 적이 없는 눈물을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이 팔려 심봉사와 하직하는 심청이의 심정을 그리는 ‘심청이 심봉사에게 이별을 고하는 대목’에서 남몰래 손수건을 훔치게 된다. 그게 바로 국악의 매력이다. 꽹과리ㆍ장고ㆍ징ㆍ북 등 4개의 악기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소리로 가득 채우는 사물놀이 공연만큼 잦은 신명의 박수를 보내는 연주회도 없을 것이다.
서양음악은 심장 박동의 템포로 연주된다면 국악은 호흡 주기의 템포로 연주된다. 국립국악원 연주단이 연주하는 한 배 느린 정악(국악의 한 갈래, 민속악의 대칭)곡의 백미인 ‘수제천’ 한바탕은 베토벤 음악의 탁월한 해석으로 유명한 독일 출신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베토벤교향곡 제5번 ‘운명교향곡’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느릿느릿한 진양조 장단으로 시작해 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 장단으로 진행되는 기악독주곡인 흐트러진 가락이라는 뜻의 산조 음악은 연주자에 따라, 주어진 시간에 따라 다르게 연주한다. 정해진 악보에 따라 연주하는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에서는 맛볼 수 없는 긴장과 이완이 교차하는 즉흥연주의 멋을 느낄 수 있다.
대표적인 사양산업으로 음반산업을 꼽고 있지만, 국악음반은 2000년부터 해마다 200여 종류(판매용과 비매품)이상의 음반이 쏟아지고 있다. 서양음악을 제외하고 어느 민족의 전통음악이 이렇게 많이 출반될 수 있을까? 그 수요로 봐도 도저히 채산성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은 하이브리드 수퍼오디오CD(SACD)가 국악음반으로 지금 출반되고 있다. 이것은 서양 클래식음악을 제외하고는 다른 음악 장르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세계 어디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국악을 전문으로 들려주는 국악FM방송국(서울ㆍ경기, 남원일원, 진도ㆍ목포, 경주ㆍ포항, 부산ㆍ전주일원)이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국악계에서는 이것들을 작은 기적이라고 한다.
국악의 DNA를 끄집어낼 수 있다면..
6000만년 전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떨어져나와 인도양에 위치하고 있는 마다가스카라섬에는 다른 세계와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관계로 독특한 동식물이 많이 살고 있다. 안락꼬리원숭이는 학습하지 않아도 타고난 기질로 가파른 암벽을 맨손으로 넘나든다. 우리는 우리의 음악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유전인자를 타고 났다. 많은 사람들이 국악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없었기 때문에 국악의 멋, 맛, 흥을 모르고 있을 따름이다. 따뜻한 봄이 오면 여기 저기 국악공연(무료공연 많음)이 열리고 국악음반 출반도 활기를 찾는다. 봄이 오기 전에 우리 국악의 아름다움을 맛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국악 한번 들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