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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국제정치학에는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있다. 민주주의 이념 자체가 평화를 지향하기 때문이라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과연 그런가.
BC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아테네 제국의 장군이며 역사가인 투키디데스가 전쟁의 전 과정을 관찰하면서 내린 결론은 다르다. "이따금 보다 크고 힘센 민주주의가 보다 약한 민주주의를 때려 부수면서 스스로를 망하게 만든다."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합국은 패전국 독일에 대해 1,320억금마르크(약 330억달러)의 배상액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제대로 갚지 않을 경우 독일 루르 지방을 점령하겠다는 조건을 단다.
독일 정부는 연간 20억마르크씩 66년간 지불하기로 합의했으나 합의문서가 마르기도 전인 그해 12월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평화의 경제적 귀결'을 통해 20년 후 유럽은 다시 전쟁의 참화에 빠져들 것이라고 예언한 것도 이때였다.
2차대전후 패전 독일도 빚 탕감 받아
2차대전에서 다시 승리한 연합국은 달라졌다. 미국·영국·프랑스 등은 런던 합의문 초안을 마련하면서 "(패전국) 독일 경제를 고려해 독일의 부채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과 당사자 간의 공정한 협상"을 인정해줬다. 1953년까지 이어진 협상 끝에 각국 정부는 물론 개인 채권자들도 독일이 갚아야 할 빚의 절반을 탕감하기로 합의했다.
런던 합의는 서독이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할 때만 채권자들한테 빚을 갚을 수 있게 했다. 상환 액수도 무역 흑자의 3%를 넘지 않도록 배려했다. 런던 합의야말로 독일 경제의 전후 부흥에 결정적 구실을 한 주역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드는가. 독일은 지금 전혀 다른 얼굴로 채무국 그리스를 압박하고 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회원국 중 가장 강력하게 채무 상환을 요구하면서 그리스를 벽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독일인들은 빚을 떼어먹는 그리스를 지원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독일 빌트지의 사설 결론이다.
이에 대한 그리스의 입장은 어떤가. 지난달 15일, 국제 채권단과의 구제금융 협상이 실패로 끝나면서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독일 등 채권국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그리스 국민의 존엄을 지킬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책임을 무시할 수 없다…국민의 존엄을 지키는 것은 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다."
이쯤 되면 서유럽 민주주의도 마냥 똑같지는 않다. 힘센 민주주의와 힘없는 민주주의가 충돌하고 있을 뿐이다.
시간의 법칙은 그리스라고 예외가 아니다. 기원전 5세기, 현 그리스의 선조 격인 아테네 제국은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멜로스 섬 주민을 압박한다.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여러분을 우리 제국에 편입시키고 싶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여러분이 살아남기를 바란다."
아테네는 조공을 받음으로써 이익이고 멜로스 주민은 살아남을 수 있으니 공동 이익이라는 투다. 그러자 멜로스 주민은 이해득실에 관해서만 말하지 말고 국제정치의 정의를 직시하자며 항복을 거부한다.
아테네 사절단은 코웃음 친다.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하는 것뿐이다…여러분은 대등한 상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므로 체면을 세운다든가 치욕을 면하는 따위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승자는 관용을, 패자는 반성을
그래도 멜로스 측의 입장에 변화가 없자 아테네군은 성인 남자를 모조리 살해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넘긴다. 아테네 제국의 후예인 치프라스 총리가 독일을 향해 "그리스 국민의 존엄을 지키는 것은 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라고 항변하는 모습은 데자뷔인가.
패망 직전 멜로스 주민은 아테네 사절단을 향해 절박한 심정으로 울부짖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은 누구나 공정한 처우를 받아야 하며 다소 타당성이 결여된 소명에 의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귀국이 넘어졌을 때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심하게 보복하는 것인지 당신들이 남에게 본보기가 돼줄 날이 올 것이다."
독일에도 그리스에도 그 날은 반드시 온다. 그것이 인류가 걸어온 길이다. 승자에게는 자애로운 관용이, 패자에게는 뼈아픈 반성이 필요함을 역사는 가르쳐주지 않는가.
그리스가 5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표차로 채권단 요구 조건을 거부했다. 이로써 독일과 그리스는 또 다른 선택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양국 모두 자신이 걸어온 역사를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때다.
/이신우 논설실장 shinwoo@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