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실명제 폐지보다 보완을(사설)

재계가 금융실명제의 전면 유보를 주장하고 나서 파문이 일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예금주 비밀보장에 대한 관행이 성숙될 때까지 금융실명제를 유보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 정부가 반격에 나서 결과가 주목된다. 재계가 문민정부의 최대 치적으로 꼽히는 금융실명제의 유보를 공식 거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시점이 경제가 벼랑끝 상황이며 또 문민정부의 임기말이라는 점에서 재계의 속내에도 관심이 쏠린다.재계의 실명제 유보 주장은 일리가 있다. 우선 예금자 비밀보호장치가 미흡, 저축의욕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명제 실시 1년전인 92년의 경우 민간저축률은 27.1%였다. 지난해엔 23.7%로 하락했다. 여기에 부유층의 과소비 풍조가 더해지면서 1년 이상 장기저축은 더 줄어드는 추세다. 자연히 기업들의 장기자금 조달길은 막혀 버렸다. 자금의 해외반출이 늘고 있는 것도 실명제에 따른 부작용의 하나다. 올들어 6월말까지 경상수지적자가 1백억달러를 넘어선 데는 상당 부분이 자금의 해외반출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현재 30조원대로 추정되는 지하자금도 산업활동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실명화 과정에서 많은 규모의 차명예금이 순환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자금시장에 경색을 가져오고 있다. 실명제가 유보되면 이들 자금이 활성화, 자금조달에 애로가 많은 중소기업들에는 인센티브가 된다는 주장이다. 재계는 실명제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위기의 원인이자 해결책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10월 신한국당이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친인척의 예금내용을 폭로함으로써 실명제의 필수조건인 비밀보호 장치가 이미 훼손됐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재계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예금자의 비밀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신한국당측에 정보를 제공한 꼴이 돼 스스로 법을 위반한 때문이다. 실명제는 경제정의의 실현과 정경유착의 고리차단을 명분으로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시행됐다. 재계의 주장도 당위성은 인정되나 모처럼 방향을 잡아가는 제도를 폐지하면 혼란이 더하다. 제도는 놔두고 운영의 묘를 살리면 된다. 보완을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실명제 대체입법을 손질해야 한다. 이번 회기중에는 어차피 물건너갔지만 내년 초라도 임시회기를 소집, 재계의 주장을 대폭 수용하는 선에서 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 실명제가 실명화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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