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탁월한 리더십 불구 대권ㆍ개헌의 꿈 못 이뤄… 절반의 성공

‘DJT 연합’으로 1997년 말 수평적 정권교체<br>경제 경륜으로 외환위기 극복에도 기여<br>내각제 개헌 못이루고 명의신탁 의혹으로 총리낙마

13일 타계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정치인으로서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자당 최고위원, 자민련 총재, 국무총리 등까지 여러 자리를 거쳤으나 지냈으나 결국 오랫동안 품었던 대권의 꿈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던 그는 1997년 고 김대중(DJ) 대통령의 삼고초려를 받아들여 ‘DJT연합(김대중+김종필+박태준)’에 참여해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도 경제리더십을 발휘하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총리로 재직하던 2000년 5월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논란이 일자 미련없이 사표를 던지면서 ‘내각제 개헌’ 등 정치인으로서 꿈을 접었다. 포항제철 신화를 이룩한 ‘철의 사나이’박태준은 정치인으로서도 적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4선(11, 13,14,15대) 국회의원을 하면서 민정당 대표위원, 민자당 최고위원, 자민련 총재에 이어 제32대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박 명예회장이 정계에 본격 입문한 계기는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보위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서 참여한 데 이어 1981년 전두환 정권에서 11대 전국구 의원(민정당)으로 당선되면서부터다. 포철 회장을 유지하면서 박 명예회장은 이후 4선 경력을 쌓았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의해 집권당인 민정당 대표에 오르며 정치 전면에 섰다. 그러나 민정당 대표 취임 후 며칠 만에 이뤄진 3당 합당(민정+민주+공화당)으로 시련을 맞았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악연 때문이다. 박 명예회장은 3당 합당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밑에서 최고위원직을 맡았으나,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각제의 대통령선거 공약화를 요구하다 YS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박 명예회장은 14대 대선 직전인 1992년 10월 민자당을 탈당했고 19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더 큰 난관에 직면했다. 같은 해 3월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한 것은 물론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997년 5월 포항 보선 출마를 위해 귀국할 때까지 4년여의 망명생활을 해야 했고, 같은 해 7월 포항북구 보선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1997년 9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와의 이른바 도쿄 회담을 계기로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에 합류한 뒤 야당 후보 단일화 협상이 타결되자 같은해 11월 자민련 총재직에 취임했다. 1997년 11월 3일 DJP 공조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뒤 박태준도 가세해 반(反)신한국당 연합전선을 구축해 DJ 당선에 기여했다.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가 조순 전 서울시장의 꼬마 민주당과 합당하고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추격했지만 DJT연합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당시 이인제 전 경기지사가 탈당해 여권표가 분열된데다 대선 한 달전에 외환위기가 갑자기 터지며 민심이 이반했고 신한국당이 주장했던 DJ비자금 의혹수사도 중단된 것이 어우러진 결과다. 당시 김대중 후보의 최측근 참모였던 이강래 민주당 전 원내대표는 “1996년 총선에서 여권에 패한 뒤 'DJ 회의론'이 팽배할 때 JP가 한 주간지 인터뷰에서 '총선에서 성과가 좋지 않으면 다른 후보를 밀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을 보고, DJP 전략을 DJ에게 건의해 성사시켰다"며 "박철언, 박준규, 박태준 등 당시 자민련의 TK세력이 많이 도와줬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자민련이 공동정부에 참여하며 여당 수뇌부가 된 박태준은 JP가 실세총리로 군림하는 동안 자민련 총재로서 DJ와 JP와 같이 외환위기 극복에 나섰으나 이면적으로는 둘 사이에서 어중간한 입장이 되기도 했다. 당시 자민련(의원 수 55명)은 국민의 정부에서 경제분야 등을 맡아 정부에서 상당한 권한을 행사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내각제 개헌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JP도 DJ에게 강력히 내각제 개헌을 요구하지 못했다. 자민련은 심지어 국민회의와의 통합과 독자노선 고수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박 명예회장은 2000년 1월 JP에 이어 총리로 발탁됐다. 그는 ‘경제 총리’로서 의욕을 불태웠지만 불과 4개월만에 낙마해야 했다.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지자 사퇴한 것이다. 2000년 4월 총선 직전 JP가 DJ와의 공동정부를 파기하고 뛰쳐나갔을 때도 총리직을 지켰던 그로서는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당시 DJ의 측근그룹인 동교동계로부터 노골적인 견제를 받던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간 남북정상회담(2000년 6월)을 앞두고 당시 정부가 북한에 대한 지원을 늘리려고 하자 “국민의 세금이므로 국회결의를 받든지 아니면 최소한 정당대표 간담회를 통해 양해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리직 퇴임 이후 박 명예회장의 정계 복귀 가능성이 꾸준히 점쳐졌지만,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며 끝내 현실 정치를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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