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조준 사격이라고?

깜짝 놀랐다. '동료를 조준해 쐈다'는 신문 제목 때문이다. 해병대의 강화도 소초에서 빚어진 소총 난사 사건은 참극 그 자체지만 사고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 있다. 바로 왜곡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극도로 흥분한 병사가 전화 부스와 내무반에서 조준 사격하는 행위가 가능할까. 조준이란 무엇인가. 가늠쇠와 가늠자, 시선과 표적을 일치시키는 행위다. 최소한의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김 상병이 정녕 동료를 조준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조준이 아니라 지향(指向) 사격해도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근거리에서 총질을 해댔기 때문이다. 조준과 지향의 차이 굳이 조준과 지향 사격을 끄집는 데는 이유가 있다. 둘의 차이가 크기에 그렇다. 조준은 지향보다 잔인하고 계획적이다. 바로 여기에서 동료를 조준해 쐈다고 제목을 뽑는 이유가 읽혀진다. '동료를'이라는 보이지 않는 강조법까지 동원한 심산에는 해병대의 군기와 도덕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는 의도가 담겼으리라. 지향 사격을 조준 사격으로 둔갑하면 위험해진다. 본질을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근원적 원인을 따져보자. 훈련소에서 정신이상 판정을 받았다는 김 상병의 비뚤어진 심리가 더 클까, 아니면 우리 사회와 군대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에 더 문제가 있을까. 제대한 지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군 생활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많은 것을 참고 눈 감아야 했던 기억 탓이다. 훈련과 업무보다도 내무 생활이 힘들었다. 김 상병을 괴롭혔다는 '기수 열외'는 해병대만의 문화가 아니다. 육∙해∙공군은 물론 전경과 의경 부대에서도 독버섯처럼 자리잡고 있다. 부대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거나 행동이 굼뜬 경우 선임은 물론 후임병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기수 열외는 우리 사회에도 '왕따'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군대에서는 폐해가 더욱 크다. 철저한 계급사회이기에 그렇다. 후임에게도 따돌림 받고 무시 당하는 기수 열외의 일차적 당사자는 병사집단이나 군의 간부들도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간부들의 묵인과 방조, 심지어 종용 속에 병사들 간의 가혹행위가 일어난다. 간부들이 고참 병사에게 '요즘 애들 잘 안 돌아가'라는 말 한마디면 내무반은 줄초상이 났던 경험이 떠오른다. 요즘에는 안 그럴 것이라고 내심 생각했었는데 해병대 사고를 보면 그게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앞으로다. 참극을 계기로 군대에서의 가혹 행위가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초등학생 때 면회했던 사촌 형님의 부대 막사에 붙어있던 '구타 없는 유신 군대'라는 구호를 본 지 39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악습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문제 해결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준다. '군기 빠진 해병대원, 나약한 젊은 세대의 의도된 범죄'라는 관점으로는 고질적 병폐를 치유하기 어렵다. 참사를 동료를 조준해 쐈다는 식으로 개인의 문제로 몰고 간다면 오래된 과제를 더욱 미궁에 빠뜨리기 십상이다. 약자를 배려하고 경쟁에서 처진 자들도 함께 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회적 반성이 없다면 참사는 언제든지 재발될 수 있다. 경쟁 만능·왕따 문화의 참극 범인인 김 상병은 자원 입대할 때 자랑스런 해병대원을 꿈꿨을 것이다. 우리 사회와 군은 힘들다고 소문난 해병대를 지원했던 젊은이의 열망을 극도의 분노로 바꾸고 결국에는 살인극으로 이어지게 만든 공범인지도 모른다. 행위야 백번 처벌 받아 마땅하지만 김 상병은 경쟁 만능주의 사회의 희생양일 수도 있다. 김 상병이 조준했다고 믿지 않는다. 정작 조준 당해야 할 것은 참사에 대한 반성 없이 군기 빠진 정신병자의 행위로 단순화하고 왜곡하려는 의도다. 참극을 계기로 서로 보듬고 함께 가는 문화, 경쟁에서 뒤져도 극단적 선택을 아니라 새 출발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닌 사회를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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