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수필] 서류더미 속에서

李建榮 (전 건설부차관)얼마 전 내가 속해 있는 학회에서 이사를 맡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인감증명을 보내달라는 전갈이 왔다. 이사란 물론 학회운영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자리이기는 하다. 그러나 친목단체 비상임직에 무슨 인감증명까지 내야 하나? 잔뜩 짜증을 부리고 미루고 미루다가 동회로 가서 서류를 만들었다. 이런 저런 일도 우리는 동회로, 구청으로 뛰어다니는 성가신 일이 너무나 많다. 요즘 구직박람회에서 우왕좌왕하는 젊은이들 보기가 안타깝다. 웬만한 직장마다 공채 공고라도 내면 경쟁이 보통 수십대 1 또는 수백대 1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준비해야 하는 서류가 너무 많다. 이력서, 입사원서, 주민등록등본, 호적등본, 자격증사본, 졸업증명서, 성적증명서, 경력증명서, 학위등록증, 연구실적물, 추천서 등등.... 그것도 부족하여 자기소개서라는 서류가 또 있다. 오늘 신문에도 어떤 회사의 사원모집 공고에 제출서류로 적혀 있는 것이 열 가지는 되었다. 이 많은 서류를 취급해야 하는 부서의 부담도 클 것이다. 그러나 번번히 떨어지기만 하는데 그때마다 서류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짜증나고 창피스러울까? 호적등본을 떼려 본적지로 뛰고 경력증명서를 만들려 전 직장를 찾아가고 추천서를 얻으려 교수를 찾아다녀야 하니 말이다. 나도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끝내고 구직행렬에 끼어 고생하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정성껏 이력서를 만들어서 유명 건축회사 서너군데로 보내었다. 그러면 대개 전화가 오고 인터뷰를 한다. 나는 당시 불법체류자인 셈인데 특별히 준비한 서류도 없었다. 성적이나 졸업여부 등 궁금한 것은 채용기관에서 직접 알아볼 일이다. 내가 연구원장 시절 연구원을 공채할 때는 이력서 한장만 제출토록 하였었다. 최종 결정되면 그때 관련서류를 제출토록 해도 늦지 않다. 그러나 인사과에 앉은 사람들의 관료의식은 마냥 불안했던 모양이다. 과거 우리는 가짜가 판치는 불신시대에 살았다. 별별 가짜가 얼마나 많았던가? 가짜박사가 교수가 되고 가짜대학생이 여학생을 울리고 가짜의사가 진료를 했다. 그래서 이중삼중의 서류를 내도록 해야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사회도 성숙되려면 잡다한 서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 뽑는 일은 물론 중요하지만 사람보다 서류를 더 중시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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