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 있어서도 지배계층이 국난극복의 기수인 적이 있었다. 신라시대엔 지배계층의 자제들이 화랑으로서 평소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고 전쟁터에서는 기꺼이 몸을 던졌다. 품일장군의 아들 관창은 16세의 나이로 백제 계백장군에 도전했으나 수차례 붙잡히는 몸이 됐고, 결국 계백장군도 관창의 패기를 높이 사면서 목을 베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전장에 나가기에 앞서 가족들의 목을 벤 계백장군의 일화 또한 삼국시대에 이른바 고위층이 그 특권에 걸맞게 높은 도덕성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삼국시대까지 살아있던 도덕성은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허물어진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 이후 지배계층 사이에선 특권은 갖되 의무는 면제되는 이른바 모럴해저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이같은 모럴해저드는 조선시대에 오면서 극심한 양상이 된다. 수많은 외침을 당하는 와중에서 평소 권력과 부를 독점하던 지배계층들은 한번도 국난극복의 전면에 나선 적이 없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나라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했있어도 양반계층들은 식솔들만 이끌고 도망다니면서 가문의 대를 잇는 데에만 급급했다고나 할까. 물론 양반들이 장수가 되고 의병운동에 앞장선 사례도 있긴 하지만 무인계층이나 극소수의 양반들에게 국한된 이야기일 뿐 양반계층 전체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죽하면 양반에겐 군역이 면제되는 제도가 수백년동안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을까. 6.25당시 한강인도교 폭파는 지배계층의 이같은 사고의 연장에 다름 아니다.
반면 서구사회에서는 지배계층이 그 특권에 걸맞게 책임도 진다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전통이 확고하게 자리잡아 왔다. 신체발부(身體髮膚)가 훼상(毁傷)돼 효경(孝經)의 제1조를 어기게 될 까 저어(두려워)하던 한국의 양반과는 달리 전쟁이 나면 귀족계급들은 장교로서 기꺼이 몸을 던졌다. 영어에서 장교에 대한 호칭인 SIR가 귀족의 호칭인 경(卿)과 같은 뜻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민혁명에 의해 귀족은 유명무실해졌지만 지배계층의 책임의식은 그대로 남아있다. 미국 최고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는 케네디 집안의 경우 2차대전에서 공군 조종사였던 큰아들인 잭을 잃었고, 하버드출신인 J.F.케네디는 어뢰정의 함장으로서 배가 격침돼 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 했다. 6.25때는 마오쩌둥(毛澤東)과 미군사령관인 밴플리트 장군이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6.25당시 고위층의 자제가 한명도 목숨을 잃지 않은 우리의 현실과는 확연하게 대비된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병역비리는 한국 지배계층들의 비도덕성을 그대로 웅변한다. 정치인들과 재벌의 자제는 단 한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 지배계층의 도덕성이 높아졌음을 확인(?)하게 된 수사결과에 대해선 그 내막을 짐작키는 어렵지만.
거대한 병역비리 속에서 일반인들은 특권만 있고 책임은 다하지 않아 지배계층의 문제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비생산적인 현행 군복무제도를 고치는 게 과제인지 오히려 헷갈린다.
崔性範정경부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