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백제 의자왕의 후손들 일본으로 건너가 어떻게 살았나

백제가 멸망한 뒤 왕족 등 백제 유민들은 일본과 중국으로 건너갔다. 일부는 유민 세력을 규합한 뒤 다시 옛 백제 땅으로 돌아와 백제부흥운동을 펼쳤으며 일부는 일본과 중국에 정착,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일본과 중국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백제학회는 3일 고려대에서 '백제와 유민'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백제학회 권오중 한신대 교수는 "일반적으로 백제부흥운동까지는 관심을 두고 이야기를 하지만 백제부흥운동 이후 유민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고 연합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지적했다. 그는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백제 멸망 후 유민들의 활약상을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 시야에 넣어 살펴볼 것이라고 소개했다.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 일본 사가현립대교수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후손들의 삶을 추적한다. 다나카 교수는 '백제왕(百濟王) 경복(敬福)을 둘러싼 문제'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의자왕의 4대손 경복을 통해 백제 유민의 삶을 복원해낸다. 경복은 의자왕의 아들 선광(禪廣)의 3대손으로, 선광은 백제 패망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으로부터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백제왕'이라는 칭호에 대해 백제 망명정권의 왕(王), 빈객(賓客)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다나카 교수는 당시 일본 정권이 선광의 후손에게 하사한 성씨(姓氏)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나카 교수는 "일본 정권이 의자왕의 아들 선광을 '백제왕'으로 대우했으나 율령 정비 과정에서 선광의 후손들을 신하로 편입시키면서 왕(王)이라는 성(姓)을 만든 뒤 그것에 '백제'를 붙인 '백제왕'이라는 성씨를 선광 일족들에게 주었다"고 설명한다. 선광의 손자인 양우(良虞)의 셋째 아들로서 백제왕씨 일족 중 특별할 게 없었던 경복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육오수(陸奧守)라는 관직을 맡고 있을 때였다. 그는 동대사(東大寺) 건설에 필요한 금을 일본 왕실에 헌납, 단숨에 높은 관직에 오르며 백제왕씨 일족 중 일약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김영관 제주대 사학과 교수는 백제 멸망 후 중국으로 끌려갔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의 생애를 집중 조명했다. 부여융의 생애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구당서, 신당서 등 역사서에 기록이 남아있으며, 1919년 중국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의 북망산(北邙山)에서 그의 묘비명이 출토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망국의 태자'였던 부여융은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의자왕의 또 다른 아들 풍장(豊璋) 등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백제 패망 후 아버지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간 부여융은 백제부흥운동에 나선 백제 유민을 회유, 설득하고 당나라군에 투항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교수는 부여웅이 백제부흥운동의 최후 거점이었던 임존성에서 부흥군을 이끌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 등의 투항을 권유하고 설득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면서 부여융은 자신이 의자왕의 뒤를 이을 태자였다는 점을 십분 활용을 것으로 봤다. 부여융의 대당(對唐) 협력은 임존성이 함락된 뒤에도 계속된다. 그는 당이 옛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둑부 도독으로 임명돼 당의 고구려 원정을 도왔으며 682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온라인뉴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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