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고 있는 금융당국의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안은 금융위원회의 자문기구인 금융발전심의위원회를 거쳐 만들어졌다. 금발심은 명실상부 우리 금융정책의 최고 자문기구다. 이 위원회를 구성하는 위촉직 위원(40명)들은 대부분이 교수들이다. 하지만 2금융권이나 보험업권에서는 많아야 1~2명의 인사만 위원회에 참여할 뿐이고 대기업 계열 금융회사 임원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러다 보니 이번 지배구조 모범규준에는 금융 현장의 목소리가 폭넓게 반영되지 못했다. 특히 위원회를 구성하는 대부분 교수들은 사외이사 임기 등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관련된 현안에만 집중했다는 후문이다.
검증이 제대로 안 된 채 발표된 지배구조 모범규준은 결국 역풍을 맞았고 금융위는 시행시기를 2주간 연기했다. 최고경영자(CEO)와 임원 선임권에 대해 과도하게 개입한다는 재계와 금융계의 반발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모범규준 내용의 대수술도 불가피해 보인다. 정교하지 못한 정책이 시장의 혼란만 초래한 꼴이다.
금융 정책부터 금융계 고위직들의 인사까지 금융당국이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
정책은 투박하고 인사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금융당국의 고위 인사들이 청와대와 정치권의 민원과 청탁을 들어주는 '심부름꾼'이 된 지 오래다.
금융계에서는 올해 국정감사에서 김기식 민주당 의원이 했던 발언을 빌어 "이렇게 어설픈 금융당국을 만나본 적이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돈다.
지난달 있었던 50만원 카드 결제시 신분증 제시를 의무화하는 카드업계의 표준약관 개정 논란은 당국의 투박한 행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규제 완화'와 '정보 보호'라는 상충되는 가치를 놓고 당국이 여론에 따라 우왕좌왕했다.
카드업계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금융당국 주도로 50만원 이상 결제시 신분증 의무 제시 내용을 담은 표준약관 개정을 준비해왔다.
이와 관련한 공익광고까지 진행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금융당국이 발을 빼면서 소비자들의 혼란만 커졌다. 카드 업계 고위 관계자는 "현장을 모르는 탁상행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당국에 끌려간 것인데 마지막에 정작 당국이 오리발을 내미니 황당했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와 카드업계가 치열하게 부딪히는 복합할부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난 2010년 삼성카드가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이 금융상품을 승인해줬던 당국은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자 올해 들어 공청회를 열고 폐지 여부를 논의했다. 하지만 캐피털사와 카드업계의 반발에 부딪혀 다시 상품을 유지하기로 했고 결국 카드사들과 현대차 간의 격렬한 갈등구조가 빚어졌다. 이 과정에서 당국은 현대차를 겨냥, 복합할부금융에 '방카슈랑스 25%룰'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어설픈 칼을 휘두르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우리은행장 금융계 고위 인사에서는 당국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외부에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지방은행과 2금융권의 감사 자리는 정치인들의 놀음판이 됐고, 금융 당국의 존재감은 없다.
당국의 추천권은 먹히지 않고 다른 통로를 통해 금융계 인사가 공공연하게 진행된다. 정식 선임 절차가 열리기 전에 CEO가 내정되고 인사 파문이 커져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내정자가 따로 있으니 여론의 비판이 거세도 당국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당국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 보니 서강금융인회(서금회) 등 비선 조직에 대한 논란만 커졌다. 더구나 금융회사의 지배구조를 확실히 개선하겠다고 모범규준까지 내놓은 순간에 인사 파문이 터지면서 당국의 위상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고 있다.
당국 스스로 정치권과 청와대의 등쌀과 여론이 비판이라는 넛크래커에 낀 신세가 됐다.
금융당국의 이 같은 갈지자 행보는 KB사태 때부터 예견됐던 부분이다. 임영록 전 KB 회장에 대한 징계 수위는 수차례 번복되고 당국 내부의 고위직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빚어졌다. 임 회장의 퇴진을 반대했던 일부 사외이사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금융당국이 LIG손해보험 인수 승인을 빌미로 그들을 밀어내기 위해 압박하는 등 KB 사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KB로의 인수를 앞둔 LIG손해보험 직원들은 KB 로고를 박은 내년 달력까지 찍어두고도 앞날을 예측하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다.
당국의 무리수와 위상 악화를 지켜보는 금융계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금융당국이 전신인 금융감독위원회 시절의 '현장 조율사' 역할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직 금융당국 고위관계자는 "KB 사태에 아무리 데였다고 하더라도 규제만 잔뜩 만들어놓는 식의 지배구조 개선은 금융당국을 이끄는 젊은 관료들의 보신주의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며 "보신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일을 처리하는 방식 자체가 너무나 투박해 시장에 자꾸 잡음(노이즈)을 일으키는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