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국가 부도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과 멕시코 등 이머징마켓은 물론 영국 등 선진국조차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기축통화 보유국인 미국은 대외 채무에 대해 지급불능 상태에 빠질 수 없다. 그런데 해외 투자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이라는 미 재무부채권(TB)을 외면한다면, 달러가치가 한없이 떨어진다면, 달러표시 금융상품을 해외로 날랐던 월가 금융기관의 주도권이 약화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런 세가지 가정이 현실화한다면 지난 1944년 브렌트우즈 협정 이후 60년간 유지돼온 달러만의 단일 기축통화 시스템은 붕괴된다. 최근 전개된 월가의 위기는 현실에서는 등장하기 힘들 것으로 여겨진 ‘달러 패권’의 글로벌 지배력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있다. 나아가 새로운 패자의 등장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지는 혼돈의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이번 금융위기는 한개 국가(미국)와 한가지 통화(달러)가 세계 경제를 지배하던 시대가 지나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최근 월가를 진앙지로 급속히 확산된 글로벌 금융위기를 이같이 진단하며 “세계는 새롭고 훨씬 더 공정한 금융 시스템을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월가 금융기관의 처참한 붕괴는 달러가 주도하는 세계경제질서, 즉 ‘팍스달러리엄(Pax Dollarium)’의 균열을 가속화하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글로벌 금융시장의 주도권이 월가의 담벼락을 넘어 새로운 안전지대로 이전할 기미는 완연하다. 최근 미국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자 런던을 중심으로 한 유럽 금융시장의 안전성이 재차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오랜 기간 월가의 횡포에 숨죽여왔던 일본 자본의 미국 금융기관 포획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엄청난 외환보유고를 무기로 새로운 패권을 꿈꾸는 중국, 오일머니를 앞세운 중동과 러시아 등이 월가의 위기를 계기로 달러를 앞세운 미국의 슈퍼파워에 도전장을 낼 채비를 하고 있다. 1999년 태동한 유로화는 달러대체 통화로 주목 받고 있고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 6개국(GCC)은 오는 2010년을 목표로 단일 통화권 수립을 준비 중이다. 이들은 7년 달러약세를 견디다 못해 ‘셀 USA’를 시작했으며 미국발 금융위기는 미국 자산에 대한 불신을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2000년 들어 매년 1조달러가량의 무역ㆍ재정 쌍둥이 적자를 내면서도 세계경제의 패권을 흔들림 없이 유지해왔다. 경상수지 적자가 해마다 수천억달러씩 쌓여도 미 재무부는 국채를 해외에 내다팔아 유동성 부족 문제를 단번에 해결했으며 경상적자로 미국 밖으로 유출됐던 달러가 미국 자산투자로 다시 돌아왔다. 이른바 ‘달러 환류 시스템’이 정상 가동한 덕분이다. 이 시스템은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 보유국인 미국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부동산 부실을 최악의 글로벌 금융위기로 확산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시스템은 달러표시 자산을 팔아온 뉴욕 금융가가 주도해왔고 월가는 달러 패권을 전세계로 확산, 전파하는 매개체였다. 손성원 캘리포니아주립대학 석좌교수는 “디트로이트가 몰락하면서 세계 자동차 산업의 다극화가 진행됐듯 월가의 독점적 지위는 흔들리고 앞으로 세계 금융허브는 뉴욕과 런던ㆍ도쿄 등으로 다극화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7,000억달러의 공적자금을 수혈 받는 월가는 앞으로 2년 동안 재무부의 ‘준관리’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미국이 국부와 경쟁력의 원천인 투자은행의 모델을 수술하고 위기를 부풀린 파생상품을 재설계하는 이 기간 동안 새로운 경제질서와 시스템을 창출하려는 세계 각국의 치열한 경쟁이 예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