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거수기 결의’이사도 손배책임

대법원"회사대표 부실대출 찬성은 '선관의무' 위반"<br>이사회 관행 개선 기대속 이사들 '소송공포' 현실화

회사의 독단적 경영판단에 대해 부당함을 지적하거나 견제하지 않고 거수기 노릇을 한 이사는 회사에 ‘선관의무(평균인에게 요구되는 정도의 주의를 기울일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는 이사들에게 회사의 경영판단에 대해 적극적인 견제와 감시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12일 대법원 3부(주심 김영란 대법관)는 파산한 K금고의 파산관재인 예금보험공사가 조모(57) 전 이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피고 측 상고를 기각, “피고는 회사 손해액의 10%를 배상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K금고는 지난 2001년 대표 문모씨가 S캐피탈에 90억원을 대출한 상태에서 8~9월 25억원을 추가 대출하기로 한 뒤 이사회 추인을 받았지만 대출금 87억원을 받지 못했고 다른 미회수 대출금도 누적돼 결국 2002년 파산한 뒤 대표와 이사 등 5명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거액이 대출된 회사에 대한 추가 대출을 추인하는 이사회에서 이사의 선관의무를 게을리한 채 대출에 찬성했다는 원심 판단은 옳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비록 대표이사에 의해 대출이 실행됐더라도 추인은 하자 있는 행위를 유효로 만들어주는 것으로 피고가 의무를 다하지 않아 추인에 찬성했다면 손해발생과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다른 이사들도 찬성했으므로 내가 손해를 끼친 게 아니다’는 피고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사들의 행위와 손해의 인과관계는 개개인이 ‘선관의무’를 다했는지에 의해 판단돼야 한다”며 기각했다. ◇이사들 ‘소송공포’ 현실화=이번 판결은 금융기관 대표가 부실회사에 대출하기로 결정한 것을 이사회가 아무런 반대 없이 추인해 손해를 본 케이스지만 이사들의 적극적인 견제와 감시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기업 이사들의 ‘소송공포’ 스트레스는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기업들도 이 같은 분위기가 경영위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소송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등 대응에 나서고 있다. SK그룹은 매달 열리는 이사회에 그룹 법무팀 관계자들을 반드시 배석시켜 모든 이사회 결정에 대해 법률적 조언을 받고 있다. 삼성그룹은 사내 법무실의 기능을 소송업무보다 ‘예방법무’로 일찌감치 전환했다. LG그룹과 한화그룹은 모든 계약이나 경영판단에 있어 법무팀의 자문을 통해 소송 리스크를 줄이려고 애쓰고 있다. ◇“이사회 관행 개선” VS “경영위축 우려” 논란도=이와 함께 임직원들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가능성에 대비, 거액의 보험에 가입해놓는 등 ‘안심시키기 전략’도 병행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임원손해배상보험에 가입한 건수는 2005년 384건으로 2000년 101건에 비해 4배 가까이 급증했다. 이번 판결로 견제와 감시기능보다는 거수기 역할에 머물고 있는 현행 이사회 관행에 변화가 올 것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예상된다. 그러나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사의 책임범위를 무한정 확대할 경우 회사의 경영판단에 제약이 생기는 등 부작용도 나타날 수 있다”며 조심스러운 반응이다. 특히 이사회 기능이 취약한 중소기업 등이 집단소송의 집중적인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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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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