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한림칼럼] 격물치지(格物致知)

아침에 라디오를 듣다가 조금은 놀라운 소리를 들었다. ‘미국’ ‘영국’ 등과 같은 용어가 일본제(日本製)라는 것이다. 원래 미국이라면 ‘아메리카’(America), 또는 보다 복잡한 영어 표현 ‘유나이티드 어쩌구’(USA)라 해야 마땅할 것이고 ‘영국’이라면 당연히 ‘브리턴’이나 ‘잉글랜드’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들 나라 이름을 ‘미국’이니 ‘영국’이니 부르게 된 것이 일본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학·기술' 명칭은 일본식표현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버젓한 한국의 국립중앙방송이 내가 좋아하는 FM클래식 시간(3월13일 아침)에 이런 잘못된 소식을 전하고 있으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이름을 처음 만들어 퍼뜨린 사람들은 몇 백년 전의 중국인들이었다. 서양의 나라 이름을 처음 알게 된 동아시아인 역시 중국인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처음 그 나라 이름을 한문식으로 만들어 붙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같은 한자문화권에 퍼져 덕천막부(德川幕府)의 일본이나 조선 왕국도 같은 용어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방송에서 소개하듯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 직전 서양 사람들이 일본에 밀려들면서 만들어진 용어가 아니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뒤 정말로 일본 사람들이 처음 만든 용어로는 ‘과학’(科學) ‘기술’(技術)을 비롯한 수많은 학술적 표현을 들 수 있다. 나라 이름 같은 지명이 중국에서 주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이런 학술 용어는 당연히 학술 활동에 앞서게 된 명치(明治) 이후의 일본이 그 용어제작을 떠맡게 된 셈이다. 처음 얼마 동안 중국인들은 ‘사이언스’(science)라는 말의 중국 표현을 ‘격치’(格致) 또는 ‘새인사’(賽因斯)라 고집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하고 20세기 초에는 완전히 일본제로 바꿔 지금은 ‘과학’(科學)이라는 일본 표현이 동아시아를 평정하게 된 것이다. 과학 기술만이 아니라 철학이니 학문이니 하는 웬만한 학술적 표현 모두 사실은 일본인들이 처음 만들어 동아시아 한자권 나라들에 퍼뜨린 것이다. 한국과 중국만이 일본 용어를 쓰고 있는 게 아니다. 베트남에서도 과학 기술 등의 일본 용어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발음은 나라마다 조금씩 틀리지만. 그런데 왜 중국에서는 원래 ‘격치’ 또는 ‘새인사’라는 괴상한(?) 표현을 썼던 것일까. ‘격치’라는 말은 한자권의 전통적 표현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줄여 만든 것이다.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넓힌다”는 말로 가장 유명한 출전(出典)을 따지자면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을 들 수 있다. 대학은 지도자(大人)의 길을 가르치는 지침서인데 그 과정으로 8조목(條目)을 들 때 처음 두 조목으로 격물과 치지를 말한다. 그 다음으로는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가 따른다. 보통 마지막 4조목(수신=제가=치국=평천하)은 누구나 외울 정도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격물치지’를 해야 한다는 대학 본래의 뜻은 잊혀져왔다. 이는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에도 지도자야 말로 격물치지를 한 후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대학본래의뜻 '격치' 되새겨야 새인사라는 표현은 중국 발음으로 ‘사이인스’쯤이 되니 영어 사이언스(science)를 그대로 한자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영어 사이언스(science)가 '새인사'가 되지 않은 것이야 유감스러울 것 없지만 ‘과학’이라는 일본제보다는 차라리 ‘격치’로 정착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일제 잔재’ 청산한다고 ‘과학 기술’도 없애자는 말은 않을 듯하다. 이것도 격치가 모자란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이 유감스러워 하는 내 불평인지도 모르지만. /박성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외대 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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