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2월1일] <1256> 레오 10세


조반니 메디치(Giovanni de Medici). 누구보다 빠르게 고위 성직에 오른 사람이다. 8세에 성직에 입문하자마자 주교 자리를 얻고 16세에는 추기경에 선임됐으니까. 비결은 돈.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메디치 가문이라는 배경 덕분이다. 금융업으로 출발해 수백년 동안 이탈리아 피렌체를 주무른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가장 특출한 인물이라는 ‘위대한 로렌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조반니에게는 운도 따랐다. 농부 출신으로 전쟁에 뛰어들기를 좋아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1513년 사망했을 때 예상을 깨고 새로운 교황으로 뽑혔다. 유력 후보들 간의 상호 견제로 어부지리를 얻은데다 가문의 재력이 뒷받침된 덕분이다. 교황 자리에 오른 뒤 스스로 ‘레오 10세(Leo X)’라는 이름을 고른 그(당시 37세)는 역대 어느 교황보다 부자였다. 메디치 가문의 재산은 물론 근검했던 전임 교황들이 쌓아놓은 교황청 재산까지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문제는 막대한 자금이 금새 동났다는 점. 과도한 낭비 탓이다. 문화ㆍ예술 등에도 지원금이 나갔지만 성대하게 차리고 맛있게 먹는 데 재산이 탕진됐다. 만찬에는 65가지 코스요리가 나왔다. 보위에 오른 지 1년 채 안 지나 교황은 이탈리아 대부분 은행에 빚을 지는 처지로 전락했다. 추기경들도 그의 행각을 따랐다. 돈이 궁해진 교황은 비상수단을 짜냈다. 고유 권한인 ‘사면권’을 대거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면죄부’를 팔기에 이른다. 면죄부 판매는 마틴 루터의 저항을 낳았다.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 대한 파문령을 내렸던 1521년의 12월 첫째 날 격렬한 진통 끝에 숨을 거뒀다. 향년 45세. 역설적으로 그의 사치가 아니었다면 억압의 역사는 좀더 길게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권홍우ㆍ편집위원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