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사의 핵심은 디자인도 첨단 기술도 아닌 스티브 잡스라는 인재(人材)였다. 창의적 인재의 대명사가 된 잡스는 애플을 잠시 떠나 있을 때조차 3D 애니메이션 회사인 픽사(Pixar)를 차려 콘텐츠 제국으로 일궜고 이후 2006년 디즈니에 75억달러를 받고 매각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명가 지브리를 이끈 미야자키 하야오, 그리고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나 유튜브의 스티브 첸 같은 '창의적 인력'이 창조산업의 핵심이다.
그러나 창조경제를 뿌리내리기에 우리 인적자본의 현실은 갈 길이 멀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창조경제역량지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정보통신기술(ICT) 자본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개국 중 1위를 차지했으나 인적자본은 하위권인 22위에 그쳤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높이 평가한 한국의 높은 교육열은 산업화 시대를 이끌었지만 입시와 경쟁 위주의 교육이 창조경제의 핵심인 상상력과 창의성 있는 인재 양성에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 있다.
◇콘텐츠 인력 수급·숙련 불일치=2009년 문화산업진흥법 제정 이후 각 대학에 콘텐츠 관련 학과 개설이 급증했고 여기다 마이스터고 등 특성화 고등학교까지 포함하면 매년 쏟아져나오는 콘텐츠 관련 신규 인력은 1만6,000여명에 이른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취업하는 사람은 1만명에 불과하다. 초과공급이 6,000명 이상이다. 그런데도 콘텐츠 관련 기업들은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인력수급의 불일치는 이 분야의 고질적인 문제다. 이유는 간단하다. 콘텐츠 기업은 최소 2~3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숙련된 인재를 필요로 한다. 수행했던 업무 분야나 프로젝트 성과까지 있다면 더없이 좋고 "4~5년 경력자면 현장에 즉시 투입이 가능하다"는 게 업계 정설이다. 그러다 보니 갓 졸업한 신규 인력은 기업 현장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게다가 콘텐츠 기업의 90% 이상이 영세기업이라 인력육성에 대한 투자가 쉽지만은 않다. '큰 맘 먹고' 신규 인력을 채용해 역량을 확보했다 싶으면 더 좋은 근로조건을 따져 대기업과 유명 기업으로 빠져나가는 인력유출이 허다하다.
또한 콘텐츠 산업 현장에서는 창의적 아이디어를 가진 인력과 이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수 있는 기술인력 모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실제 인력수급에서는 장르별 특화 인재에 대한 '쏠림' 현상이 발생한다. 게임 산업의 경우 프로그래머에, 연예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배우나 가수 등 실연자들에 관심이 쏠리는 경향이 있다. 영화산업에서는 감독, 공연 분야에서는 작가나 연출가 등 '예술 지향형' 인재육성에만 치중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예를 들어 방송 분야의 경우 PD와 작가 외에 조명감독, 카메라감독, 프로그램 유통, 홍보, 마케팅 담당자가 필요하다. 게임산업에서는 프로그래머와 그래픽 디자이너, 콘셉트 디자이너, 해외 수출 마케터 등 다양한 인력이 요구된다. 분야별 특화 인재가 필요한 이유다.
◇산학협력이 숙련 불일치 해소의 열쇠=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사립종합대학 카네기멜런대(CMU)는 학생들의 등록금이 아닌 각 기업체의 기부금과 연구지원 자금으로 움직이는 전형적인 연구 대학이다. CMU의 연구센터 중 1998년 설립된 엔터테인먼트테크놀러지센터(ETC)는 순수예술에 정보기술(IT)을 접목시킨 대표적인 '인력양성' 기관이다. ETC는 단순히 책상 앞 공부에 그치지 않고 월트디즈니 등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직접 수주하거나 요청한 프로젝트에 학생 인력을 참여시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곳 출신의 절반은 큰 어려움 없이 취직에 성공하고 월트디즈니 등 관련 업체들은 ETC를 현장에 곧바로 투입할 수 있는 인력을 배출해내는 화수분으로 여기고 있다. 이 같은 산학협력 시스템은 학교가 배출하는 전문인력의 능력과 기업이 원하는 숙련도·경험치와의 간극을 줄이는 해법이 될 수 있다. 김재하 서울예대 산학협력단장은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예컨대 '픽사반' '디즈니반'을 구성해 시작부터 '기업 맞춤형' 교육을 하고 있다"며 "프로덕션에 필요한 것들은 관련 기업이 후원함으로써 우수 인력에게 맞춤형 교육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는 이와 유사한 산업계 맞춤형 인력양성사업으로 '계약학과'가 운영 중이다. 가천대 컴퓨터미디어 전공학과에 개설된 '게임프로젝트트랙'이 대표적인 계약학과다. 채용을 전제로 선발된 50명의 학생들에게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예산으로 국고지원 장학금을 100% 지급하고 학교는 계약을 체결한 게임사를 염두에 둔 맞춤형 교육을 실시한다. 졸업생의 즉시 취업을 성사시키는 '산·학·관 협력 모델'이다. 현재 가천대 외에도 숭실대 스토리텔링경영학과, 경기대 전자출판콘텐츠학과, 전주대 인터랙티브미디어학과 등 8개 대학에서 매년 260명 이상의 학생이 지원 받고 있다.
그러나 영세한 국내 콘텐츠 기업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인력양성에 자금을 투입하고 산학 협력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산업화 진행 과정에 있는 국내 콘텐츠 기업들이 보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일정 부분의 인력 육성과 투자에 대한 위험부담은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관련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2012년 12월 개봉해 5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타워'의 컴퓨터그래픽(CG)를 담당한 디지털아이디어의 박영신 대표는 "회사가 스페셜리스트(전문가) 양성에 적극 투자하면 조직에 대한 로열티(충성도)도 커지고 빼어난 결과물을 내놓으면 회사의 브랜드 가치도 커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T자형' 창의인재 나올 사회적 환경에 장기 투자 필요=창의적 인력이 현행 학교 교육 시스템에서 과연 태어날 수 있을까. 창의력과 상상력은 어린 시절 생활 속에서부터 축적된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예상 못한 융합의 시도는 결코 가르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육을 통한 창의 인력 양성에는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조기교육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OECD 창조역량지수에서 종합지수 및 인적자본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한 스위스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직업을 체험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있고 현장 교육의 토양이 견고하다. 중학교 때부터 지역 기업·병원 등지에서 인턴십을 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 있을 정도다. 또한 스위스는 우리나라와 달리 대학 진학률이 30%에 불과해 직업적 다양성에 대한 개방적 사고가 창조적 직군에 대한 도전을 자극하고 있다. 마이스터고를 포함한 특성화 고등학교도 졸업생의 80%가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우리 현실과는 대조적이다.
우리의 경우 교육부가 시행하는 '자유학기제'를 창의인재 조기교육에 활용할 수 있다.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와 콘텐츠진흥원 등이 자유학기제 협업기관으로 참여해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토론식 교육부터 다양한 문화와 직업 체험을 지원하고 있다. 이현주 한국콘텐츠진흥원 창의인력양성팀장은 "창의적 인재란 남이 해보지 않은 포맷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조언하며 "창의인력 양성에는 그 어떤 분야보다 장기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박승준 콘텐츠창업팀장은 "예술영재나 과학영재는 육성방법이 있다지만 콘텐츠 분야 인재는 '융합인재'라 접근 방법이 다르다"면서 "인문·예술 등의 소양을 기반으로 깊이 있는 수직적 전문성과 그 분야에서 타 분야와 교류하며 퍼져나가는 수평적 확장성을 가진 'T자형 인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