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커피하우스의 문을 닫아라. 영원히.’ 1675년 12월29일, 영국 국왕 찰스 2세가 커피하우스 폐쇄령을 내렸다. 국왕은 시한도 불과 열이틀 뒤인 1676년 1월 10일로 못박았다.
영국의 역대 국왕 가운데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지는 못해도 백성들의 생활에는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지켰다는 찰스 2세가 페쇄령을 발동한 명분은 여성들의 압력. ‘여성을 대표한다’는 단체의 익명 탄원서가 1674년 ‘커피에 대한 여성들의 청원서’라는 이름으로 올라갔다. 청원의 골자는 ‘남자들이 가정을 등한시하는 요인인 커피하우스를 없애달라는 것’. 청원서에는 ‘힘을 고갈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음료 때문에 섹스가 방해 받는다’는 문구도 들어 있었다.
정말로 커피 때문에 가정 생활에 영향 받았을까. 개연성이 없지 않다. 1645년 영국에 처음 소개된 커피하우스는 한 잔에 1페니만 내면 하루 종일 머물 수 있어 온갖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커피하우스에 눌러 앉아 귀가 시간이 늦어졌으니 밤일이 지장받았을 수 있다. 남성들의 사교명소로 떠오른 커피 하우스에서는 신분의 고하와 재산 유무에 관계없이 정치든 경제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국왕이 내린 폐쇄령의 진짜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국왕 찰스 2세는 아버지인 찰스 1세가 시민 혁명으로 목이 잘려나간 아픈 기억을 한으로 품고 있었던 인물. ‘페니 대학’으로도 불릴 만큼 토론과 의사 소통의 마당으로 자리 잡은 커피하우스에서 정치 토론이 이뤄진다는 점을 ‘불온’하다고 인식해 국왕은 실체 여부도 불분명한 ‘여성단체’의 청원서를 내세웠다. 폐쇄령의 문구에 그 뜻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다. ‘불만을 품은 자들이 모여 국왕과 대신(장관)들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는 장소는 없어져야 한다.’
찰스 2세는 뜻을 관철시켰을까. 정반대다. 시한을 이틀 앞두고 스스로 폐쇄령을 거뒀다. 정파와 신분ㆍ직업을 떠나 수많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커피가 술보다는 훨씬 낫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의 탄원도 줄을 이었다.
폐쇄령 철회에 따라 살아남은 영국의 커피 하우스는 오래지 않아 홍차에 밀려났으나 경제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선원들이 주로 찾던 에드워드 로이드의 커피점이 해상보험으로 발전한 것을 비롯, 영국 금융의 자생적인 싹이 커피하우스에서 움텄다. 영국이 자랑하는 왕립학회도 과학자들의 커피 모임에서 비롯되고 뉴턴의 저작 역시 커피하우스 토론을 발전시킨 결과물이라는 해석도 있다.
확률과 경제학을 예측 가능한 과학으로 불러들인 계기인 ‘드 무아브르의 종모양 곡선’(독립된 사건들이 어떻게 정규분포를 따르는지를 규명한 좌우대칭의 곡선)도 평생 소속 대학도, 직장도 없었던 무아브르에게 토론과 사색의 장소를 제공했던 커피하우스에서 나왔다.
찰스 2세의 포고령대로 커피하우스가 문을 닫았다면 영국의 학문과 금융, 과학은 폭발적 성장의 동인의 일부나마 잃었을지도 모른다. 커피하우스는 사람들의 격의 없는 만남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창의성이 극대화하는 마당이었던 셈이다.
해프닝으로 끝났던 커피하우스 페쇄령이 내려진지 340년. ‘모든 커피하우스를 폐하라’는 명령 속에 숨은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입을 봉하라’는 획책은 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광장에 많이 모이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발언이 2015년 대한민국에서 장관의 발언으로 버젓이 나오는 판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만남과 자유토론을 무서워한 국가나 지도자가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