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1월8일] 조지 비셀


석유의 역사가 그로부터 나왔다. 광물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예견하고 정밀분석을 의뢰하며 자금 모집과 채굴ㆍ생산까지 모든 과정이 그를 거쳤다. 주인공은 조지 비셀(George Bissell). 초기 석유사업자들의 꿈도 한결같았다. ‘비셀처럼 성공하자!’ 비셀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 1821년 11월8일 뉴햄프셔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주경야독으로 다트머스대학을 나와 라틴어와 그리스어 교사, 신문기자로 일하며 홀로 공부해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월가의 주식전문 변호사인 비셀이 석유와 인연을 맺은 것은 1853년. 휴식차 방문한 석유 샘플을 구경한 그는 직감적으로 연료로서의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석유는 두통이나 치통ㆍ류머티즘의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지던 시절이다. 비셀은 월가의 투자자들을 모으고 당대 최고의 화학자인 예일대학의 실리먼 교수에게 성분 분석을 의뢰, 1855년 4월 ‘석유는 이상적인 조명용 연료’라는 보고서를 받았다. 채굴지역으로 인구 125명의 가난한 마을 타이터스빌이 정해진 것은 1857년 12월. 석유(石油ㆍRock Oil)라는 말 그대로 바위 틈에서나 흘러나오는 물질이라고 생각했던 시기에 비셀은 철도직원 출신인 드레이크를 고용해 굴착을 시도했다. 모두가 미친 짓이라고 여겼지만 비셀의 판단과 드레이크의 노력은 1859년 8월 결실을 거뒀다. 시추자금 2,000달러가 바닥날 무렵, 석유가 터진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수직 굴착식 시추 성공! 돈방석에 오른 비셀은 고향과 모교에 재산을 기부하고 말년에는 고등학교 교장을 맡아 존경도 받았다. 비셀의 성공기는 수많은 사람을 석유로 끌어당겨 거대한 석유산업과 석유화학산업을 낳았다. 남다른 예지력으로 현대 석유문명을 이끈 비셀은 1884년 이런 걱정 속에서 죽었다. ‘석유자원 고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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