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초연 땐 대관조차 힘들었지만 51개국 289개 도시서 1000만 관람
올해부터는 중국시장 문도 두드려
라이선스 작품이 흥행은 쉽지만 어려워도 창작뮤지컬 만드는 게 행복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법이다. 지난 1997년부터 전 세계 51개국, 289개 도시의 문을 두드렸고 1,000만명이 마음의 문을 열었다. 한국말로 '두드리다'라는 의미의 비언어 공연 '난타'가 국경을 초월해 지난 17년간 일궈낸 성과다. 한국 최초의 넌버벌(비언어) 공연에서 출발해 장기공연과 해외진출이라는 쉽지 않은 관문을 지나온 '난타'. 그 성공의 중심에는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도전해온 '난타의 아버지' 송승환(사진) PMC프로덕션 회장이 있다.
"난타의 장기흥행 비결요? 한국만의 독특함도, 세계적인 보편성도 모두 잡은 스토리의 힘이죠." 서울 대학로 사무실에서 만난 송 회장은 마치 잘 키운 자식을 소개하는 아버지 같았다. 그가 기획·제작한 대한민국 최초의 넌버벌 공연 '난타'는 지난해 말 기준 누적 관객 1,000만명을 돌파했다. 1997년 10월 초연 이후 한국을 포함 세계 51개국 289개 도시에서 3만1,290회의 공연을 펼쳤다. 영화에서야 익숙한 '1,000만 관객'이지만 라이브 공연의 1,000만은 의미가 남다르다. 송 회장은 "수천 개의 스크린에서 동시에 상영하는 영화와 달리 공연은 매일 라이브로 한정된 공간에서 관객을 만난다"며 "한 공연이 17년간 롱런해온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독창성과 보편성의 조화, 난타의 성공비결=요리사 3명과 지배인 1명이 결혼 피로연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주방도구와 사물놀이 리듬을 활용한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대사 없는 이 단순한 공연이 세계인을 사로잡은 비결은 뭘까. 송 회장은 '독특함과 보편성의 공존'을 꼽았다. "기획부터 해외진출을 목표로 작품을 만들었어요. 언어에 구애받지 않는 비언어극이었지만 차별화를 위해서는 한국적인 독특함이 가미돼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사물놀이를 결합했습니다." 그러나 독특함만으로는 세계인의 공감을 살 수는 없는 법. 송 회장은 독특함과 어우러질 보편성을 주방에서 찾았다. "주방은 전 세계 누구나가 가진 공간입니다. 주방에서 한복이 아닌 요리사 옷을 입는 콘셉트는 그래서 만든 것이죠. 누군가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했지만 중요한 점은 한국적인 것과 글로벌한 것의 조화입니다."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패밀리쇼'는 애초 해외진출을 겨냥해 기획된 만큼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도전이 쉽지만은 않았다. 공연문화가 활발하지도 않던 때, 심지어 '넌버벌'은 대중이 처음 들어보는 장르였다. "당장 극장 대관이 쉽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유명 배우가 나오는 작품도 아니고요. 당시 호암아트홀 대관 담당자를 무작정 연습실로 데려와 어떤 작품인지를 보여주며 설득했죠." 송 회장의 두드림이 통한 것일까. 난타는 1997년 10월 호암아트홀에서 초연됐다.
◇'난타'의 도전은 이제 시작=처음부터 성공을 장담했던 것은 아니다. 송 회장은 "'이런 작품이면 해외진출이 가능하겠다'는 생각 정도만 했을 뿐 지금 같은 성과를 쉽게 예상할 수는 없었다"며 "1999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참가 당시 전회 매진을 기록하고 기립박수를 받으면서 비로소 확신이 생겼다"고 전했다.
난타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지난해 상하이에서 '난타' 공연이 시작됐고 마카오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올해 6월에는 광저우 난타 전용극장의 문을 열고 본격적인 중국 시장 공략에 나선다. 송 회장은 "1,000만 관객까지 17년이 걸렸는데 지금은 전용관도 늘어나고 중국 시장이 열렸기에 7~8년 안에 2,000만 관객을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며 "'난타'의 도전은 지금부터"라고 힘줘 말했다.
◇배우 휴식 중 만난 제작자의 꿈=송 회장은 대중에게 공연제작사 대표보다 배우로 더 익숙하다. 8세였던 1965년 아역 성우로 데뷔한 그는 연극·드라마 등 장르를 불문하고 종횡무진 활약해왔고 한때는 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 TV쇼 '젊음의 행진' MC를 맡아 여성들의 가슴깨나 설레게 했던 청춘 스타였다. 배우로서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1985~1988년 미국 뉴욕에서 생활하며 '제작자'라는 새로운 꿈을 키우게 됐다. "워낙 어릴 때부터 배우생활을 하다 보니 지치더군요. 한국에는 외화도 몇 편 안 들어오고 뮤지컬은 볼 수조차 없던 때라 문화적 갈증도 컸고요. 1983년 드라마 해외촬영으로 잠시 뉴욕에 머물렀었는데 이때의 짧은 경험을 계기로 외국행을 결심했어요. 3년간 수많은 작품을 보며 충격도 받고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욕심이 생겼죠."
귀국 후 연기활동을 하며 시기를 모색하던 그는 1994년 뮤지컬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를 시작으로 1995년 창작 뮤지컬 '고래사냥'을 무대에 올렸고 1997년 ㈜PMC를 세워 본격적인 공연제작에 나선다.
◇배우와 제작자, 그 운명 같은 직업=배우와 공연제작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드라마 '여로'를 끝으로 대입 준비를 위해 연기활동을 중단했다. 어려운 집안형편을 고려해 전공도 연극영화과가 아닌 아랍어과로 선택했다. 중동 붐이 불던 시절 무역회사에 들어가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었다. 꿈을 접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대학 연극부의 공연을 보는데 '아, 내가 왜 이걸 그만둔다고 했을까'하는 생각이 밀려오더군요. 결국, 부모님 반대에도 학교를 때려치웠죠." 대학을 자퇴한 그가 찾아간 곳은 젊은 예술인들이 만든 '76극단'. 그는 이곳에서 1976년 '관객모독'으로 연기를 다시 시작하고 1977년에는 스물한 살 나이에 오태석 선생의 연극 '루브'를 각색해 연출자로 이름을 알렸다. 그때부터 배우와 제작자를 병행하는 삶을 40여년간 이어왔다. 최근에는 제작을 맡은 뮤지컬 '라카지'에 출연도(보수적인 정치인 에두아르 딩동 역) 하며 1994년 윤석화와 호흡을 맞춘 소극장 뮤지컬 '사의 찬미' 이후 20년 만에 뮤지컬 무대에 섰다. 그는 "그 배역만 캐스팅되지 않아 내가 섰다"고 농을 던지고는 "젊은 관객이 좋아할 법한 배우들과 함께 관록 있는, 어른 세대에도 익숙한 배우들을 함께 캐스팅해 관객도 넓히고 세대의 조화도 이뤄보고 싶었다"며 "노래 못하는 내가 출연한 것도 다 그런 이유"라고 웃어 보였다.
◇창작 뮤지컬 확대로 경쟁력 키워야=송 회장은 그동안 소위 '돈 되기 힘든' 작품을 주로 무대에 올려왔다. 실제로 그가 선보인 작품 상당수는 '젊음의 행진' '달고나' '형제는 용감했다' 등 창작 뮤지컬과 어린이 공연이다. '감' 좋은 송 회장이 이런(?) 공연에 대한 투자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송 회장은 "재미있게 내 것을 만들 수 있는 작업이 좋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라이선스 작품이 훨씬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남이 다 만들어놓은 것 아니겠느냐"며 "어려워도 우리 아이디어로 하나둘 만들어가는 게 행복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여러 문화 장르 중 뮤지컬만 유독 수입이 많다"며 "중국이라는 큰 시장이 열릴 것에 대비해 뮤지컬도 해외수출을 위한 다양한 창작작품을 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올 2월 창작 뮤지컬 '난쟁이들'을 무대에 올린다.
끊임없이 두드리며 도전해온 송승환. '또 두드려보고 싶은 문이 있느냐'는 질문에 쿨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동안 너무 많이 두드렸어요. 새로운 거 두드릴 생각은 없어요." 새로운 것에 대한 욕심보다 지금의 삶에서 행복을 찾고 싶다는 게 그의 속내다. "죽는 날까지 연기하고 공연을 만들다 보면 재미있는 배역도 만날 수 있고 '난타'보다 좋은 작품을 만들 수도 있겠죠. 이것만 한 행복이 어디 있겠어요."
He is… △2001년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 △2011년 성신여대 융합문화예술대학 초대 학장, 한국 뮤지컬 협회 이사장 △현 PMC 프로덕션 예술총감독, 문화산업포럼 공동대표, 성신 여대 융합문화예술대학 교수, 문화융성위원회 위원 |
기합·몸짓으로 이야기… 오이·양파 등 수십만개씩 '난타' ■비언어극 '난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