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퇴출 뒷처리가 어렵다
은행권, 대상기업 정밀심사 돌입
부실기업 퇴출의 대수술은 시작됐지만 그 뒷수습은 간단하지 않아 보인다.
은행권은 일제히 부실징후 기업을 추출해 정밀심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도마 위에 오르게 될 기업을 어떻게 칼질할지 구체적인 방법론에 들어가면 여전히 막막하기만 하다.
워크아웃 중이거나 법정관리 기업이라면 「룰」에 따라 처리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서로의 이견을 조율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은행을 제외한 채권금융기관들의 의견을 어떻게 반영할지 논의조차 안되고 있다.
묘안은 없다. 채권단 협의기구를 만들고 사전에 「협약」을 제정해 다수 의견을 채택하는 「워크아웃 방식」이 준용될 가능성이 높을 뿐이다. 일부 시중은행은 당국과의 교감 하에 이미 「협약」 마련에 착수했다.
그러나 채권은행 일부가 반대의견을 고수하면 제재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시장에 맡기겠다. 소수 의견도 존중되도록 하겠다』던 금융당국의 방침과도 배치된다.
◇부실판정 결과 어떻게 조율하나=아직까지 은행들은 확실한 「도구」를 개발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 시중은행 실무진은 『「협약」과 「협의기구」를 만들어 다수 의견을 수용하도록 하는 방법 밖에 없을 것』이라며 『심사대상 기업별로 주관은행(주채권은행)이 주축이 돼 협의기구가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러나 강제성이 없는 게 문제다. 워크아웃 기업이라면 이른바 「75% 룰(채권액 기준 75% 이상의 찬성으로 의사결정)」대로 처리할 수 있다. 법정관리 기업은 법원이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나머지 기업들은 채권단의 합의가 필요하다.
여기에 해당되는 기업 중 거의 모든 은행이 걸려 있는 굵직한 업체들만 추려도 현대건설, 대림산업, 동부계열 일부사, 해태제과 등 20여개에 달한다.
법정관리(청산)를 결정하면 오히려 간단하다. 자본금의 10% 이상에 해당하는 채권자가 법정관리를 직접 신청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구를 전제로 한 자금지원이나 출자전환의 경우 찬반이 엇갈릴 가능성이 높고 결국 채권단 내부의 갈등과 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결국 사적 화의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채권단의 합의를 끌어내는 수밖에 없지만 결코 수월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밝혔다.
◇비은행 채권단 입장 고려돼야=대개의 부실판정 대상기업들은 금융채무 중 은행에 의존하는 비중이 크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일례로 심사대상에 포함된 해태그룹의 경우 2금융권 여신의 비중이 50%가 넘는다.
이러한 기업에 대해 은행들의 판정만으로 퇴출·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아직 내부 조율방안도 확정하지 못한 은행들은 비은행 채권자들까지 고려할 여유가 없다. 모두들 시한에 쫓겨 기계적으로 심사대상 기업의 점수만 매기고 있을 뿐이다.
◇예고된 혼란상=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버리기」를 작심한 은행들도 있다. 특정 기업에 대해 다른 모든 은행이 자금지원을 결정하더라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경우 해당기업은 소수 채권단의 힘에 의해 퇴출될 가능성도 있다.
결국 밀고 당기는 채권단 내부의 합의 과정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중간에 당국이 개입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이미 모든 것을 은행에 맡기겠다고 공언한 정부가 표시나게 개입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혼선을 겪다보면 회생 여부가 채권단에 달려 있는 한계기업들은 그 자체로 위기가 될 수 있다. 속전속결로 끝내지 못하면 기업퇴출을 통한 구조조정 정지작업은 실패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는 지적이다.
성화용기자
입력시간 2000/10/1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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