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4월 9일]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

"유명한 작가는 관련 기록이 넘쳐나지만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작가는 기억 속에만 잠시 살다 사라집니다. 어떻게 작업하다 언제 돌아가셨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유족을 수소문하고 동년배 작가를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해야 했죠."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 미술인 인명록 1'을 출간한 김달진 김달진미술연구소 소장의 말이다. 이 책에는 1850년생 채용신부터 1960년생 사석원까지 한국 근현대 미술계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한 작가 4,254명과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관장 등 비창작 분야 미술인사 655명을 포함해 총 4,909명의 주요 정보가 수록됐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작가들을 조사한 미술인 인명록은 나온 적이 있으나 근현대 작가를 망라한 이 같은 방대 인명록은 처음이다. 지난 7개월간의 인명록 제작 막바지 작업을 떠올리는 김 소장의 말은 한 개그맨의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치열한 경쟁을 뚫고 미술사에 한 획을 그으며 정상에 오른 화가, 예를 들어 박수근ㆍ이중섭ㆍ김환기ㆍ천경자 등 손꼽히는 화가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으뜸은 그를 지지하는 2인자와 3인자, 나아가 대다수의 범인(凡人)들이 있기에 빛을 발하는 법. 하물며 예술 분야에서는 지속적으로 작업하는 다수의 작가들이 문화적 토양을 마련한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일례로 한 '호랑이 그림' 소장가는 화가의 이름 석 자 외에 아는 정보가 없어 답답했는데 이번에 발간된 인명록에서 어떤 작가인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그는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내 집에 잘 어울리고 우리 가족과 오랜 인연을 이어온 작품이니 어떤 고가의 작품과 비교해도 꿀릴 게 없다"고 말했다. 소장자의 이 같은 생각은 최근 미술시장이 '투기성'으로 변질돼 화가의 유명세와 이름값에만 의존하는 기이한 풍조에 경종을 울린다. 이런 트렌드의 확산은 미술시장의 성장세에 비해 자료와 기록 확보가 취약한 우리 미술계에 좋은 거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 소장이 1979년부터 개인적으로 자료 수집을 진행한 지 31년 만에 빛을 본 이 인명록은 주요 박물관과 전국 국공립도서관, 혹은 통의동 김달진미술자료 박물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인명록 발간이 이름 한번 불리지 못하고 묻혀버린 작가들을 다시 한번 보듬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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