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1월17일] 로버트 오언


하루 15시간 노동은 보통이고 대여섯살짜리 고사리손마저 기계를 돌리던 19세기 초 영국. 뉴래너크 방직공장은 천국이었다. 11시간 노동에 깨끗한 사택까지 제공됐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일 대신 부설학교에서 공부하며 놀았다. 세계최초의 유치원도 운영했다. 노동환경과 조기교육이 개인과 사회의 장래를 결정한다는 공장주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의 신념에서다. 오언은 1771년 웨일스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 때부터 점원으로 일하며 자수성가한 인물. 불황에도 해고나 임금삭감 없이 생산공동체를 운영한 그에게는 질시와 명성이 함께 따라붙었다. 영국 정부는 그에게 산업평화ㆍ노동환경 개선에 대한 정책자문도 구했다. 대안으로 제시한 협동조합안이 정부와 자본가들에게 거부당하자 그는 1824년 ‘자유의 나라’ 미국행을 택했다. 인디애나주에 3,672만평을 사들여 ‘뉴하모니’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설립한 것. 오언의 유토피아는 실패로 끝났다. 온갖 악당과 부랑자ㆍ사기꾼의 농간 속에 재산만 날린 그는 1828년 영국에 돌아와 아동취업 금지를 골자로 한 공장법 제정에 앞장섰다. 1833년에는 50만 회원으로 구성된 ‘대국민통합노동운동’이라는 전국적 산업동맹도 만들었다. 노동운동의 결말도 실패. 정부의 박해와 내분 탓이다. 거듭된 실패에도 오언은 1858년 11월17일 87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10여권의 저술을 통해 희망을 전파하려 애썼다. 프랑스의 생 시몽, 푸리에와 더불어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불리는 오언의 실패는 보다 과격한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로 이어졌다. 애덤 스미스 이후 자본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던 맬서스류의 경제학이 도덕적 부담을 자각하고 자본주의 경제에 복지 개념이 들어온 것도 오언부터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