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Culture&Life] 태국 영화감독 겸 현대미술가 아피찻뽕 위라세타쿤

"영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본질 담아낼 수 있죠"

과학과 미신 함께 보며 성장

내안에 있는 '상상의 유령' 통해 보아야 할 것 찾아내려 노력

꿈은 기억의 가공이지만 더 많은 현실 이야기해줘 꿈 소재로 신작 만들고 싶어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들이 있다. 눈을 뜨고도 못 보는 것들도 있다. 분명 존재하는 대상이건만 결코 온전하지 못한 우리의 눈(目)은 종종 오해와 착각에 빠져들고는 한다. 지난 2010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영화 '전생을 기억하는 분미 삼촌(이하 엉클 분미)' 등 실험영화의 감독이자 현대미술가로 활동 중인 태국 출신 아피찻뽕 위라세타쿤(44)에게 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작품의 주제다. '엉클 분미'를 보면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으로 찾아든 분미 삼촌에게 죽은 아내의 유령이 돌봐주겠다며 나타나고 오래전 실종된 아들은 원숭이 귀신의 모습으로 집에 돌아온다. 분미가 유령의 모습을 한 가족들과 함께 정글 너머 그의 생이 시작된 곳으로 향한다는 내용의 '다소 난해한' 이 영화는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았다. 감독의 이름만큼이나 어렵다는 평이 따르지만 그의 작품들은 눈으로만은 다 담을 수 없는 세상의 본질을 추적한다.

"어린 시절 SF와 귀신에 대한 이야기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저는 모든 기억을 완벽히 간직하려는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쓰셨던 낡은 영화 카메라를 발견했고 이것은 타임머신인 동시에 '기억의 저장상자'가 됐습니다. 제가 수집한 기억이란 '모조리 기억을 다 할 경우 위험해질 수 있는' 그런 것들에 대한 기억을 말합니다. 믿기지 않는 일들이 내 주변에서 벌어질 때면 저는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저들은 귀신이다'라고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는 합니다. 우리는 아마 서로서로 흔들며 '정신 차리고 깨어있으라'고 일깨워줘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두려움의 귀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들이 오기를 바랍니다."


11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제7회 양현미술상' 시상식에서 상을 받아든 아피찻뽕의 소감이다. 2002년 칸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발을 내디뎠고 2년 뒤에는 '심사위원상'을, 2010년에는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상 복 많은 거장의 수상 소감은 한 편의 시(詩)였다. 물론 소감은 그의 작품과도 닮아 콕 집어 분명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 이해와 어렴풋이 공감할 수 있는 암시적인 말이었지만.

숱한 찬사와 상이 뒤따름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그의 영화들은 재미있지도, 쉽게 이해되지도 않는다. 아름답지도 않다. 거칠다. 정제되지 않은 화면은 흔들리고 어둑하며 지직거리기까지 한다.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보통의 영화들이 매끈한 고속도로라면 그의 실험적 영화는 돌부리가 마구 차이는 '비포장도로'다. 그러나 그 거친 길의 덜컹거림을 우리 몸이 기억한다. 그 때문에 기묘하게도 영화 깊은 곳에서 서정성과 정겨움이 배어난다.

인터뷰를 극히 꺼리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를 시상식 전날 단독으로 만나 '어려운 작품세계'에 대해 물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사를 끄집어냈다.

"태국 동북부의 내 고향 콘캔은 40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는 시골이었어요. 나는 의사인 부모와 병원 내 사택에서 15년을 살았고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보였던 것은 그들이 아팠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때의 시간은 지금의 시간과 달랐습니다. 창이 큰 어머니의 진료실은 내 놀이터였고 그곳에서 나는 현미경으로 미생물과 기생충을 봤고 청진기로 내 심장박동을 들었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빛을 갖고 놀고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다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에 대해 생각했고 (미생물처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성장한 아피찻뽕은 건축학을 전공한 뒤 대학원에서 영화학을 공부했고 자신의 작은 프로덕션인 '킥더머신'을 설립했다. 그는 소박했다.

"나는 그저 영화를 찍는 게 좋았고 내가 공부한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는 실험영화의 산실이었죠. 나의 이야기, 내 주변의 이야기로 작품을 만들었고 내 자리에서 내 고향, 내 지역을 바라봤을 뿐인데 미술관과 갤러리의 요청이 찾아들더군요. 다큐멘터리감독·영화감독·미술가로 분류하는 건 내가 아니라 큐레이터들이었죠."

그는 작가가 된 이유를 겸손하게 에둘렀지만 진정성과 정체성은 자신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2001년작 '친애하는 당신'은 태국의 사회적 이슈인 미얀마인 불법체류를 다뤘지만 정치적·사회적 시선을 배제한 채 따뜻한 인간관계로만 풀었고 2004년작 '열대병'은 군인 켕이 휴가를 나와 친구 통을 만나 시간을 보내는 전반부와 군대로 복귀한 켕이 정글에 사는 괴물을 찾아 나서는 내용이다. 내용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지만 선명하게 각인되는 것은 태국의 정글이다. 탁월하게 빛을 다루는 작가가 정글의 녹색 빛에서 생명력 넘치는 원시적 아름다움을 포착해 보여준다. 또한 여기서 자연과 인간은 평등하며 만물에는 고유한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그의 세계관을 만날 수 있다.

"나는 과학과 미신에 대한 추종을 함께 보며 컸습니다. 미래적 과학과 상상적 유령이야기가 합쳐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앞으로는 그런 것이 공존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과 정령의 존재감은 내 안에, 세상 곳곳에 내재돼 있습니다. 영화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의 기억·환영·상상력도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것들이지만 과학의 산물인 기계에 의해서 우리는 영화로 만들어 보니까요."

그의 작품을 주목해야 할 이유 중 하나는 태국과 한국의 정치·역사적 유사성이다. 시골 마을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군부에 억압당한 사건을 다룬 아피찻뽕의 작품은 광주항쟁이나 간첩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분열됐던 태국의 옛 국가들이 무력 혹은 왕족 간 결혼을 통해 단기간에 통합된 과정도 작가를 자극했다. 메콩강을 따라 자국의 역사를 추적하던 작가는 2005년 '프리미티브(primitive)'시리즈를 시작했다. 역사적 격변을 경험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과거사를 잘 모르는 10대들과의 공동작업이었다. 그들의 아이디어로 멀리 떠날 수 있는 교통수단을 만들었고 그 결과는 동물과 기계를 결합한 형태의 우주선으로 탄생했다. 같이 작업한 청소년들은 이 우주선(?) 안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고 작가는 이를 사진과 영상작품으로 남겼다.

"붉은빛이 가득한 우주선 안에 잠든 청소년들의 모습인데요, 이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꾸면서도 공산주의와 직결된 금기 색인 붉은빛에 의해 통제되는 미래상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이런 역사적 해석을 가진 우주선은 지금도 마을 풀숲에 놓여 있습니다. 내가 꿈꾸는 미술은 이런 교통수단(일종의 소통수단)을 만들고 갤러리나 미술관이 아닌 자연 속에 전시해 모두와 소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화의 기존 틀을 깨부쉈던 작가는 미술의 틀마저 뚫어버리는 중이다. 작가의 태도마저 초월적이어서 태국 시골 마을의 스님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빈곤과 억압에서 탈출하기 위해 우주선을 상상하듯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탄압에서 탈출하고자 했기에 가난한 태국 북동부에서 훌륭한 스님들이 많이 나왔는지도 모르죠. 게다가 태국에서는 올해로 민주주의가 사라졌고 조지오웰의 '1984'는 금지됐으며 공연하던 퍼포머(행위예술가)가 구속됐습니다. 이제는 눈을 감고 현실이 현실이 아니길 바라야 할 좋은(?) 시점입니다."

심각하게 목소리를 낮춘 작가는 현실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읊조리며 신작에 대해 처음으로 소개했다.

"우리가 잘 때 꾸는 꿈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의 수면상태와 렘(REM)수면에 빠져드는 4단계를 살펴보면 그 시간이 90~120분이더군요. 이 시간은 보통 영화의 시간과 일치합니다. 영화의 길이가 우리의 수면리듬에 맞춰진 것은 아닐까요. 영화가 하나의 꿈이고 우리는 매일 밤 꿈을 꾸며 매일 나만의 영화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꿈은 현실에서 받아들인 의식·무의식적 정보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점도 영화와 다를 바 없습니다. 꿈은 기억의 가공이지만 더 많은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이 또한 영화와 같습니다."

작가는 고향 콘캔에서 폐교였으나 병원으로 사용 중인 공간을 배경으로 신작을 찍고 있다. 침대에 누워 잠든 군인들은 남성성과 힘의 상징인 '군인'이건만 무기력하다. 침대 주변의 간호사·의사·간병인·가족 등도 그들의 잠과 꿈이 전이된 듯 눈을 감고 있는 장면도 등장한다. 수면 상태인 사람의 생체리듬에 맞춰 빛을 바꾸면 그 빛 스펙트럼에 의해 몸의 리듬이 또 바뀐다. 즉 외부에서 잠든 사람의 몸이나 의식, 나아가 꿈까지 제어할 수 있다.

"공상과학영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입니다. 정치적 탄압이나 불합리한 나라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선택한 '잠', 즉 저항의지로서의 수면이 다른 차원의 현실이 될 수도 있는데요. 그럼에도 과학의 개입으로 꿈을 조종하거나 통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보아야 할 것들을 찾는 작가는 독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조언했다.

"전구가 켜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광파는 지극히 짧은 시간에 수없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착시죠. 영화도 하나의 착시입니다. 실재를 어떤 틀로 보느냐는 각자의 마음과 추억에 달렸죠. 여러분도 각자의 기억상자로서 카메라를 들고 늘 질문을 던지십시오."


He is…

△1970년 태국 콘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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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콘캔대 건축학과 졸업

△1997년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영화학 석사

△1999년 영화 프로덕션 '킥 더 머신' 설립

△2002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상 '친애하는 당신'

△200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열대병'

△2004년 부산비엔날레 참여

△2006년 영국 리버풀비엔날레 참여

△2007년 도빌아시아영화제 최우수작품상

△2007년 미국 LA 래드캣갤러리 개인전

△2009년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 국제부문 오버하우젠대상

△2009년 영국 FACT 개인전

△2010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전생을 기억하는 분미 삼촌'

△2011년 아시안필름어워드 최우수작품상

△2012년 카셀도큐멘타 참여

△2014년 양현미술상 수상



"우리 마음이 영사기" … 영화로 삶의 무대 확장한 '정글의 세르게이'

■ 그가 주목 받는 이유

아피찻뽕 위라세타쿤이 받아든 양현미술상은 예술을 사랑했던 고(故) 조수호(1954~2006) 한진해운 회장을 기리며 2008년 제정된 미술상이다. 올해로 7회를 맞아 국제적 위상을 쌓아가고 있는 양현미술상은 세계 각국의 미술계 인사로 구성된 추천단과 더불어 크리스 더컨 영국 테이트모던 관장과 아담 D 와인버그 미국 휘트니미술관 관장을 심사위원(임기 3년)으로 위촉해 권위를 드높이고 있다.

작가와 작품 보는 안목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들 관장에게 "왜 아피찻뽕이어야 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터컨 관장은 아피찻뽕을 가리켜 "정글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라고 했다. 구소련의 영화감독으로 20세기 영화사에 중요한 거장으로 족적을 남긴 이에 빗대 "아피찻뽕의 영화에서는 많은 것들이 녹색 빛을 띠는데 이는 태국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작가가 새롭게 녹색을 발견했다는 의미가 더 크기에 '정글의 세르게이'라 부를 만하다"면서 "태국의 정글과 시골 마을들을 유령과 초현실적인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장소로 만들면서도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영화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등 영상의 새로운 시학을 정립한 작가"라고 극찬했다.

와인버그 관장은 "최첨단의 기술이 다양한 표현법을 낳게 했지만 아피찻뽕은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의 원초적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해 우리가 잊고 있던 본성과 본능을 재조명한다"며 "그는 '우리의 마음이 영사기(our mind is a projector)'라는 말로 우리 삶의 무대를 영화로 확장한 '삶의 거장'이자 물리적인 빛부터 상상의 빛까지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빛의 거장'"이라고 평했다. 어렵지만 그래도 아피찻뽕에게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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