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간의 예상을 깨고 도피생활중 1년정도만 진정한 의미의 도피생활을 했고 나머지 기간은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도피행각=그의 도피행각은 한 마디로 첩보영화를 연상케 한다. 李씨는 지난 89년 1월 정식 수배된후 1년여동안 당국의 추적을 피해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변장을 한 채 주로 열차여행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열차를 이용한 것은 버스나 자가용에 비해 검문을 당할 가능성이 낮다는 판단에서였다.
누구보다도 경찰의 검문행태를 잘 알고 있는 그는 이 과정에서 말쑥한 차림을 한다 절대로 짐을 들지 않는다는등 나름대로의 도피원칙을 세웠던 것으로 드러났다.
李씨는 1년여간의 떠돌이 생활을 마친 뒤 상식의 허를 찔러 도피처로 과감하게 자신의 거주지를 택했으며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을 중심으로 2∼3차례 이사하면서 은신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집을 옮길때 감시망을 따돌릴 수 있는 환경을 갖췄는지를 우선적으로 살피기도 했으며 주변의 이목을 피해 부인의 미용실에도 왕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집 화장실 벽을 뚫어 몸이 겨우 들어갈 정도인 높이 1.7m, 폭 0.5m의 크기로 방공호 같은 은신공간을 마련했고, 은신공간에는 차단막을 설치하는등 탐문수사에 대비했다.
그는 은신생활중 몸이 아파도 절대로 병원에 가지 않는등 도피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실제로 그는 7년전 이가 아파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실을 이용, 혼자 썩은 이를 뽑아내기도 했다.
도피생활 초기에 그는 동료 경찰관들의 도움도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 조사결과 그는 도피생활 첫해에는 동료경찰관들이 부인을 통해 보내준 매월 30만원 가량의 생활비를 받아 쓴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점=李씨가 11년간의 도피생활중 한차례도 검문을 당하지않은 것이나 자택에 머물면서도 적발되지않은 점등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않는 대목이다. 이는 누군가 도피를 비호했거나 검거전담반까지 운영하며 그의 뒤를 쫓았던 검·경의 수사체계에 중대한 허점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검찰은 지난 88년말 李씨가 수배된후 서울지검 특수1부에 李씨 검거반을 운영했고 93년부터는 강력부에 검거반을 확대설치, 李씨를 추적했다. 특히 경찰은 경기경찰청 강력계에 수사전담반이 편성했고 李씨 가족등 친인척 18명의 연고지 관할인 서울·부산·인천·경기·충남·경남등 6개 지방경찰청 14개경찰서및 李씨와 함께 고문에 가담한 공범자 10명의 거주지 관할 서울·부산·인천등 3개지방경찰청 10개서에도 수사반을 편성, 활동해왔다. 지난 10여년동안 동원된 경찰은 연인원 389만명에 달하고, 검문검색 횟수도 358회에 달했다.
그런데도 거주지에서 대부분의 도피생활을 해온 李씨를 검거하지 못한 것은 수사체계에 중대한 허점이 있던지, 아니면 李씨를 일부러 잡지 않았던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임웅재기자JAELIM@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