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중은행 프라이빗뱅킹(PB)센터는 예년보다 한산하다.
통상 8월 세제 개편안 발표 이후 이맘때쯤이면 대응 솔루션을 만들기 위한 자산가들의 상담으로 PB센터마다 분주하지만 올해 풍경은 사뭇 다르다.
지하경제 양성화, 세수 확대라는 흐름 속에 세무조사라는 돌발 변수마저 나타나자 자산가들이 노이로제 반응을 보이며 상담마저 기피하는 탓이다. PB센터마다 예년 대비 적게는 20~30%, 많게는 절반 가까이 상담 건수가 줄어들었다는 말이 나온다. 부자들이 일단 소나기는 피하자는 심정으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다는 얘기다.
하나은행의 서울 을지로 본점 상속증여센터 관계자는 4일 "보통 세법 개정 법안이 발표되고 나면 하루에 전화만 60통, 이후에도 30~40통씩은 오는데 요즘은 20여통 수준"이라며 "대면 상담도 예년보다 줄어 하루 3~4건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저금리와 과세 강화로 상담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도 세무조사라는 불확실한 리스크 때문에 상담을 미루는 것 같다"고 전했다.
우리은행 투체어스 강남센터도 최근 예년에 비해 상담 건수가 20%가량 줄어드는 등 다른 은행의 상황도 대동소이하다. 한 대형 은행 PB 관계자는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 강화, 즉시연금 과세 등 지난해부터 과세당국이 시장에 세수 확보라는 시그널을 계속 내보내 상담 필요성이 반감된 측면도 있고 심리적 위축도 작지 않은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실제로 예년만 해도 별다른 특이사항 없이 지나갔던 자금 거래에 대해서도 올해는 유독 과세당국이 문제 삼는 경우가 많아 부자들이 황망해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나온다"며 "아예 움직이기 겁난다는 말까지 하는 VIP도 많다"고 말했다. 다른 은행 PB 관계자 역시 "기업 최고경영자(CEO) 고객이 많은데 안부 인사가 '세무조사 받았느냐'일 정도"라며 "세무조사는 자산가 입장에서 가장 큰 리스크이고 예측도 어려워 더 난감해한다"고 설명했다.
은행권에서는 올 초부터 일부 지점별로 5만원권 품귀 현상이 빚어졌었다. 타인 명의 예금 등 상대적으로 자금 출처가 불투명한 고객들이 자산을 5만원권이나 달러 등으로 바꾸는 일이 드물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산 축적 과정이 떳떳한 부자마저도 위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움직임이 오히려 돈맥경화라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세금을 많이 걷겠다고 하지만 부실 과세가 늘어날 수도 있다"며 "과세당국의 전방위적 세무조사보다 차라리 세율을 올려 자산가의 심리적 위축을 막는 게 더 나은 방안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과세 강화라는 촉매제가 더해져 자산가들의 상담 내용에서도 상속ㆍ증여 쏠림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삼성생명 패밀리오피스 관계자는 "법인 상속세 상담이 크게 늘었다"며 "가업 승계 공제의 경우 매출 기준이 종전 2,000억원 이하에서 3,000억원 이하로 대상이 확대됐지만 최근 세무조사 강화 등과 맞물리면서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는 "상속세를 줄이기 위한 증여에 관한 문의가 많고 세후 수익률을 올리기 위해 소득 분산에도 신경 쓰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