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 십 년간 지구촌 경제는 미국, 독일, 일본 등 세계경제 3대축의 강한 추진력에 의해 견인돼 왔다. 미국 경제가 세계경제 전체를 앞에서 끌고 독일 및 일본 경제는 뒤에서 이를 미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이 같은 균형과 조화가 깨지게 됐다. 일본 경제는 증시가 폭락한데다 부동산 버블마저 꺼지면서 장기간의 경기 침체에 빠지게 됐다. 독일 경제 또한 유로화 도입에 따른 독자적인 통화정책 상실과 막대한 통일비용 부담으로 활력을 잃었다. 결국 유럽 경제의 엔진이라 할 수 있는 독일 경제의 침체는 유럽 각국의 경기 불안으로 이어졌다. 이어 97년에는 타이에서 시작된 외환위기가 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각국으로 번져나가 아시아 전체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또 유럽 각국은 유럽통화동맹(EMU)이 주창한 재정긴축 정책을 잇따라 받아들이면서 경기 회복세의 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면 90년대 후반 증시 활황에다 제조업 경기 호전에 따른 미 경제의 견조한 성장세는 이 같은 세계경제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됐다. 한국 등 아시아 주요국이 외환위기를 빠른 시일 내에 극복한 것도 굳건한 미 경제가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실제 이 때만 해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경제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00년 초반 미 증시의 버블이 꺼지기 시작해 2001년에는 본격적인 경기 침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계경제의 기관차인 미 경제가 제 힘을 내지 못하고 그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는 것이다. 언뜻 경기침체는 금방 끝날 것처럼 보였다. 2001년 후반 들어 미 경제의 각종 거시지표는 경기침체의 골이 그리 깊지 않고 짧은 이른바 `벨빗침체(velvet recession)`를 예고했다. 실제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2을 차지하는 민간소비는 여전히 왕성한 모습을 보였다. 부동산 가격의 급등세는 증시 침체에 따른 투자자들의 손실을 만회하기에 충분했다. 곧 경기 회복세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져 갔다. 하지만 경제 문제는 정치 상황과 결코 떨어질 수는 없는 관계다. 9ㆍ11 테러는 이제 막 회복세를 보이려던 미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다. 게다가 분식회계 문제, 스톡옵션 처리 등을 포함하는 미국 기업경영의 불투명성이 잇따라 불거지자 미국식 자본주의의 신뢰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기업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도 심각했다. 실례로 기업 종업원들의 연금이 에너지, 텔레콤 기업의 주식에 투자돼 막대한 투자원금을 까먹는 가운데 일부 경영진들은 내부자 거래로 막대한 부당이득을 챙겼다. 미국 경제가 더블딥(W자형 이중침체)을 거치고 않고 회복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희망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경제지표가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9월과 10월의 산업 생산성은 저하됐으며, 기업들의 고용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월가의 발 빠른 채권 투자자들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이 또 한차례의 금리인하를 단행할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 FRB는 더블딥 상황을 피하기 위해 0.5%포인트의 금리 인하를 단행해 기준금리가 40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인 1.25%에 머물게 됐다. 필자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해 동맹국을 규합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미 국민의 3분의 1이 전쟁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2003년 미 경제라는 세계경제의 기관차는 앞으로 힘차게 나가기는커녕 뒷걸음치게 될 것이 뻔하다. 다음의 두 가지는 최근 각종 통계에 기초해 필자가 점치고 있는 미 경제에 대한 단기 전망이다. 1. 아직 의견이 분분하지만 2003년 미국의 경제 성장률은 2~3%선에 이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 같은 성장세는 경기침체 위험을 극복하는 동시에 아태지역, 유로랜드,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회복세를 북돋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성장률로는 그 동안 해고되었던 노동자들을 재고용할 수 없고, 기업수익도 크게 개선시킬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2. 2004년에 경기침체가 다시 나타날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8:2 정도로 반대 의견이 많지만 현대 경제학이라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하지 못하다. 또 일본 및 독일 경제가 성장의 한계를 딛고 새로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미 경제가 그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사려 깊은 정책 입안자들과 유권자들은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건망증이 심한 타조처럼 우리는 그 평범한 사실을 종종 잊고 있다. 어떤 시장경제 시스템이라도 시기에 상관없이 작동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민주주의하의 시장경제는 결국 그때 그때의 이성과 지식에 의존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폴 새뮤얼슨(미국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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