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세계는 지금 자원패권시대] <2>저무는 미국의 주도권

'테러와 전쟁' 이후 상당수 산유국 "反美"로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대표들이 지난 17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OPEC 정상회담 개막식에서 압둘라 사우디 국왕의 개막사를 듣고 있다. /리야드=AP연합뉴스

지난 2001년 9ㆍ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미국은 시장안정을 위해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기름값을 올리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때는 OPEC이 미국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달 17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OPEC 정상회담에 앞서 미국이 석유증산을 요청했지만 산유국들은 원유증산 여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달러 약세를 성토했다. 반미 성향의 산유국인 이란과 베네수엘라는 “정상회담 공동선언문에 미국 달러화 약세에 대한 회원국의 우려를 넣어 석유수출 이익을 갉아먹는 약달러 추세를 시정하도록 미국에 경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OPEC 내 최대 지분을 갖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거부로 최종 선언문에는 담기지 않았다. 선진7개국(G7) 회담이나 국제통화기금(IMF) 회의에서 나올 법한 미국 달러화 환율 이슈가 OPEC 회의에 상정된 것이다. OPEC 정상회담은 그야말로 친미와 반미의 대결장이었고 미국의 세계 에너지 패권이 시험대에 오른 자리였다. 미국은 중동 석유를 장악하기 위해 2003년에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엄청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이라크는 미국에 점령됐지만 당시 중동 산유국의 어느 관료는 “미국이 힘으로 중동을 지배할지 모르지만 석유는 우리의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이 이슬람 세력을 겨냥해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중동 산유국의 상당수가 반미 성향으로 돌아섰고 베네수엘라마저 반미로 돌아서면서 미국의 세계 에너지 패권의 입지가 좁아졌다. 미국의 에너지 패권이 저물고 있다. 미국의 패권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산유국들이 석유거래에서 달러 결제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축통화로서의 달러 체제는 크게 흔들린다. 미국의 안마당에 위치한 베네수엘라가 미국의 세계 패권에 도전한 것은 바로 석유를 무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석유가 동서 냉전시대의 핵무기를 대체하는 패권의 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위기는 달러화의 약세에서 나온다.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이자 최대 석유회사를 보유한 미국이 석유시장에서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60년대 이후 미국은 OPEC과 협정을 맺어 석유 결제 통화를 달러로 통일하는 대신 산유국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미국은 2개 사단을 사우디에 파견해 아직도 주둔시키고 있다. 이후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위기가 있었지만 ‘달러’로 상징되는 미국의 에너지 패권, 나아가 세계 정치경제 패권은 유지됐다. 하지만 달러 약세가 지속되면서 양측의 공조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달러로 받는 석유대금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미국이 우리 석유를 가져가는 대신 값어치 없는 종이다발만 안겨주고 있다”고 성토했다. 상당수의 산유국들은 석유거래에서 유로 등 비(非)달러화에 대한 비중을 늘리고 있다. 달러화에 자국의 환율을 고정시킨 ‘페그제’ 폐지가 불가피하다는 목소리도 잇따라 나온다. 미국 패권을 위협하는 또 다른 요인은 중국 등 신흥소비국의 급성장이다. 산유국들이 중국이나 인도 등의 새 시장으로 점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아직 세계 석유소비시장의 4분의1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비중은 점차 줄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하루 평균 2,058만배럴이었던 석유소비량이 96년(1,830만배럴)에 비해 10년 동안 12% 늘어난 데 그쳤다. 이에 반해 중국의 소비량은 같은 기간 하루 370만배럴에서 744만배럴로 무려 101%가 늘었다. 인도도 하루 170만배럴에서 257만배럴로 51% 증가했다. 중국ㆍ인도 등 신흥산업국들이 고도성장을 구가하면서 석유 구입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베네수엘라ㆍ이란 등 반미파들이 미국을 거부하게 된 것도 중국이라는 시장이 생겼기 때문이다. 미국 수요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게 된 셈이다. 사우디 등 나머지 OPEC 국가, 러시아, 아프리카 모두도 마찬가지다. 급성장하는 중국 시장에 석유를 팔기 위해 줄을 대고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셈이다. 미국의 에너지 패권이 약화되면서 동시에 자원민족주의는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전세계 매장량의 4분의3 정도는 해당국의 국영석유회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서구의 메이저 석유회사들도 이제는 이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시대가 됐다. OPEC이 대외 발언권을 높일 수 있는 것은 잉여생산능력 때문이다. 미국 달러가 약세를 보이면서 OPEC이 미국에 의존하는 정도도 점차 줄어들었다. 산유국들의 폭주가 계속될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러시아 등 신흥산유국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구소련 붕괴 후 결단난 러시아 경제를 재건한 일등 공신은 바로 세계 최대 매장량을 갖고 있는 천연가스와 석유다. 에너지를 유럽ㆍ중국ㆍ일본 등지로 공급하면서 해당지역의 목줄을 쥐고 있다. 런던 소재 국제정치컨설팅 회사인 유라시아그룹의 그렉 브리디 석유 애널리스트는 “OPEC이 미국과 긴장관계를 갖는 것이 불가피해졌는데 이는 좋은 현상일 수 있다”며 “그들은 스스로가 미국에 종속되지 않은 강한 집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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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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