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불량 부모

정문재 정보산업부장

“얘야, 올 여름에는 집에 올 필요 없다. 서울에서 공부나 해라.” 중학교 시절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농사를 돕기 위해 고향으로 달려가던 친구는 3학년 때는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당부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다. 매년 7월이나 8월이면 농촌은 폭우 아니면 가뭄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아버지로서는 농사일도 급하지만 아들의 고등학교 진학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연합고사라는 게 그저 한 반에서 1~2명 정도만 떨어질 정도로 쉬웠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날마다 농사로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지만 아들의 진학, 나아가 성공은 그런 희생을 감수하게 만드는 희망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살림에도 학비와 하숙비는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었다. 그 친구는 지금 대기업에서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중년층의 평범한 모습이다. 지금의 중장년층은 부모들에게 큰 빚을 진 세대다. 그들의 성취나 성공의 이면에는 부모들의 희생이 있었다. 자신은 못 먹고 못 배웠더라도 자식에게는 가난이나 무지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부모가 있었기에 생활이 어려운 농촌에서도 대학생들이 늘어날 수 있었다. 부모의 희생속에 성장한 중ㆍ장년층 불과 30~40여년 사이에 한국은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경험했다. 지난 60년대 초 100달러에도 못미쳤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해 1만4,000달러 수준으로 무려 140배나 늘었다. 이런 비약적인 발전은 당장은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앞으로는 잘살아보겠다’는 결의와 실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려는 의지와 노력에 힘입어 적어도 물질적인 삶은 과거에 비해 크게 나아졌다.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해진 탓인지 이제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려는 의지는 크게 꺾인 것 같다. 지금 당장 많이 쓰고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 수만 있다면 자식들은 어찌 되건 상관없다는 식의 ‘몰염치’와 ‘무책임’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이러다 보니 미래에 자식들이 벌어들일 소득까지 앞당겨 써버리는 행태가 일반화되고 있다. 개인이나 정부를 가릴 것 없이 빚 무서운 줄을 모른다. 우리나라의 가구당 부채는 현재 3,000만원이 넘는다. 보통 월급쟁이들이 1년 내내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야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얘기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저축률은 줄곧 두자릿수를 유지했지만 2000년대 들어 한자릿수로 떨어졌다. 악착같이 모아 빚을 갚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언젠가는 해결되겠지”라는 근거 없는 낙관 속에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쓰기만 할 뿐 빚은 자식에게 떠넘겨 자신이 떠안고 있는 빚조차 무서워하지 않으니 나랏빚은 아예 ‘남의 일’이다. 대표적인 예가 국민연금 문제다. 국민연금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은 부모 세대의 연금을 보전해주기 위해 소득의 34%를 토해내야 한다. 하지만 국민연금 보험료를 늘리는 동시에 수령액을 축소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면 여기저기서 거센 반발이 쏟아진다. 국가채무도 지난해 말 203조원을 넘어섰다. IMF 외환위기 당시인 97년의 60조원에 비해 무려 세 배 이상 늘어났다. 더욱이 행정중심도시 건설에 공공기관 이전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정부재정은 상당기간 동안 만성적인 적자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릴 것으로 보인다. 지나치게 많은 빚은 결국 파국을 불러일으킨다. 관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빚이 늘어나면 IMF 외환위기 때와 같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개인 빚이건 나라 빚이건 모두 국민들이 부담해야 한다. 지금은 그냥 넘어간다고 해도 언젠가는 담세율이 크게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은 짐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자식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누구나 돈을 벌기보다는 쓰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정도가 있다. 부모 덕분에 누리는 상대적인 풍요로도 모자라 이제는 자식들에게 희생과 고통을 전가하려는 게 중장년층의 모습이다. 우리의 부모가 ‘훌륭한 부모’였다면 우리는 자식들로부터 ‘불량 부모’ 소리를 듣게 될 것 같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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