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한국산업이 흔들린다] (上)머니게임에 멍드는 산업기반

지난해 말 비상장사인 ㈜만도는 총 1,000억원에 달하는 자사주를 매입, 유상 소각하는 방식으로 대주주들에게 돈을 나눠줬다. 이는 지난해 순이익 950억원을 웃도는 것. 최대주주인 JP모건(지분 76.07%)이 여론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주주 배당 대신 유상소각 방식으로 투자 원금을 한꺼번에 뽑아간 셈이다. 이후 만도의 사내 유보금은 400억~500억원 가량으로 쪼그라들었다. 만도에 다시 한번 유동성 위기가 닥친다면 마땅한 대응방법 없이 고스란히 앉아서 `제 2의 워크아웃`으로 떨어져야 할 지경에 처했다. 국내기업에 외국인 대주주가 늘어나면서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보다는 단기적인 주가 부양 등 머니게임에 치중하면서 부작용도 넓고 크게 나타나는 상황이다. ◇투기자본만 헤집고 다닌다= 재정경제부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65억 달러로 4년 연속 급감했다. 그나마도 외국자본 투자대상의 대부분은 서비스업(55%)에 집중돼 기술 이전이나 수출 촉진 등 우리 경제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부문에서의 기여도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반면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국내기업의 외국인 투자비중(금액기준)은 40%에 달하는 등 외국인들의 영향력은 막강해지고 있다. 현재 외국인 지분율이 국내 최대주주 지분율을 초과한 회사는 41개다. 특히 삼성전자ㆍ포스코ㆍ국민은행ㆍSK㈜ 등 한국 대표기업 중 상당수 외국인 지분율이 절반을 넘는다. 한눈에도 산업발전과 직결되는 외국자본보다는 머니게임을 겨냥한 단기성 금융 자본이나 투기 자본이 국내 금융시장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이다. 심지어 외국계 투기 펀드 3~4개만 모이면 대표적인 한국기업들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갈 것이란 말도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한국 산업, 투기자본에 무방비 노출= “듀퐁이나 바스프 같은 세계적인 화학회사가 접근했다면 이렇게 결사 항전하지도 않는다. 소버린자산운용이 최태원 SK㈜ 회장 등 현 경영진을 무력화시킨 뒤 SK텔레콤 지분 등 돈 되는 지분을 몽땅 팔아치우고 떠나면 SK㈜에는 뭐가 남느냐.” 외국계 투기자본인 소버린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SK그룹 관계자의 한탄이다. 외환위기 이후 매물로 내놓은 알짜 기업 인수로 재미를 톡톡히 봤던 국제 금융자본은 이제 정상적인 국가 대표기업의 경영권마저 노리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소버린이 SK㈜를 인수할 경우 러시아에 투자한 가즈프롬을 위해 정유ㆍ탈황 시설을 쪼개 팔 가능성도 제기한다. 더 큰 문제는 소버린이 SK 지배구조개선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정체도 불분명한 투기 자본이라는 점이다. 신영투자신탁운용은 최근 소버린에 투자 목적과 배경, 향후 경영전략을 밝혀달라고 했으나 회신이 오지 않아 오는 3월12일 열리는 SK㈜ 주총에서 SK가 제시한 정관 변경안과 사내외 이사 추천안에 찬성하기로 결정했다. 장하성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운영위원장도 “수천명의 국내외 투자가를 만나봤지만 소버린처럼 정체를 알 수 없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머니 게임으로 전락= 쉐브론 텍사코가 대주주(지분 50%)인 LG칼텍스정유의 경우 지난해 배당 성향은 66.1%로 지난 2002년보다 26.9%보다 2배 이상 올랐다. 한마디로 지난해 순익의 66%를 배당으로 챙겼다는 얘기다. 이는 그룹 지주회사인 ㈜LG 자회사들의 평균 배당 성향의 2배 이상에 달한다. 외국인 산업 자본이 이 정도니 국제적인 금융ㆍ투기 자본의 폐해는 더 심각한 수준이다. 이들 외국인 투자가들은 `주주 이익 극대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고배당을 요구하고 있다. 소로스펀드(지분율 31.96%)가 경영권을 장악한 서울증권이 지난 2001년 직전 해에 비해 10배나 늘어난 60%의 고배당(액면가 대비)을 실시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실제로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들의 증권투자소득(주식배당ㆍ채권 이자 등)은 25억8,700만 달러로 지난 2002년 22억2,400만달러보다 16.3%가 늘어났다. 이 같은 외국인 투자가들의 모럴 헤저드에는 외국계 증권사들도 가담하고 있다. 지난해말 한국전력이 5.8%의 배당수익률을 발표하자 메를린치 증권과 골드만삭스, CSFB 증권은 잇달아 매도 의견을 내는 등 투자의견을 하향 조정했다. 양세영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팀 팀장은 “국내 기업들이 출자총액 규제, 금융회사 의결권 제한 등에 다른 나라에는 유례가 없는 규제에 묶여 있는 동안 각종 투기 자금들만 한국경제를 교란하고 있다”며 “특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역차별 조항만이라도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 외국인 최대주주 기업들 영업익 독점노려 脫증시 “돈이 있는데 귀찮게 왜 상장을 합니까.” 저금리로 자금조달 여건이 좋아지자 상장을 기피하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다. 상장ㆍ등록에 따른 규제와 소액주주의 간섭이 시달리느니 아예 기업공개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이 최대 주주로 부상한 기업들은 이익독점을 위해 기업공개를 꺼리고 있고 이미 상장ㆍ등록된 기업도 상장폐지를 통해 `사기업화`를 추진하고 있다. ◇기업 비공개로 이익독점=외국인 최대주주 기업들의 `상장기피`와`증시 탈출`에는 현금이 풍부한 우량기업의 지분을 확보한 후 소액주주를 포함한 외부의 간섭 없이 영업성과를 독점하겠다는 속내가 깔려있다. 유동성이 풍부한 우량주인만큼 증시에서 자금조달의 필요성이 없고 상장ㆍ등록에 따른 규제를 피해 글로벌마케팅을 활용할 경우 보다 높은 수익을 올려 모회사에 지분법 평가익으로 이익을 이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자회사의 실적개선은 모회사 주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지난해 상장폐지에 실패한 옥션의 대주주인 이베이의 경우 26개 자회사 중 매출 3위인 옥션의 실적이 이베이 주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철재 코스닥위원회 등록심사부장은 “번거로운 공시와 소액주주를 상대해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국인 대주주 기업들이 시장을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우량주, `탈(脫) 증시` 우려확산=외국인 최대주주 기업들의 증시 이탈이 늘어날 조짐을 보이자 폐쇄적인 국내 기업들도 기업공개를 꺼리는 것은 물론 은근히 상장ㆍ등록폐지를 바라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장 기피현상이 국내 IPO(기업공개)시장에 우량주 품귀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손승균 대우증권 IB사업부장은 “엘트웰 등과 같은 비상장 대형 우량기업들의 경우 기업공개가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여기고 있고 소형기업들은 증시에서 찬밥신세가 되느니 차라리 공개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기회만 주어진다면 상장을 폐지하려는 기업도 늘고 있다. 일본 덴소사가 40.98%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덴소풍성이나 외국인 단일 대주주 지분율이 78%에 달하는 피케이엘 등은 공개매수를 통한 상장ㆍ등록폐지 가능성이 높은 종목으로 꼽힌다. 또 롯데제과ㆍ롯데칠성은 외국인 지분율 증가에 따른 거래량 감소현상이 지속되자 오히려 거래량 미달로 상장폐지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상장ㆍ등록 메리트 키워야=기업들의 상장기피 현상의 가장 큰 이유는 상장에 따른 이득보다 부담이 더 크다는 것이다. 자금조달이나 인지도 제고 등 상장ㆍ등록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주주총회 등 각종 비용에다 주주들의 심기까지 일일이 살펴야 하고, 감독 당국의 요구조건이 까다로워진 점도 기업들에겐 부담스러운 요인이다. 실제 상장 폐지된 극동건설ㆍ쌍용제지 등의 경우 1년에 한번 감사보고서만 제공할 뿐 경영정보가 일체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 현재 상장ㆍ등록 기업들에 대한 지나친 정보 공개 요구와 소액주주 이기주의가 우량주들의 증시 기피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증권사 IPO관계자들은 “우량 기업들의 상장유인과 함께 상장폐지를 막기 위해서는 상장유지비용을 줄여주고 경영정보 공개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하는 등 정책적인 메리트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최형욱기자 choihuk@sed.c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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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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