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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67> 탕평비


정도전이 구상한 정치는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다. 조선후기로 가면서 균형이 깨진다. 크게 두 가지 원인 때문이다. 신료들이 자기분열 과정을 거치면서 단일성이 약해졌다. 즉 당파 간 대립이 심화됐다. 반면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의 경제·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국왕의 힘이 커졌다. 왕권이 신권을 결정적으로 누르게 된 것이 영조 때다. 결과는 '탕평책'으로 나왔다. 주요 당파였던 노론과 소론을 억누르고 국왕의 전제가 시작된다. '탕평(蕩平)'이라는 말은 중국 고대경전인 '서경'의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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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편을 갈라 싸우지 말라'지만 실제는 '내 말대로 해라'다. 영조는 1742년(영조 18)에 국립대학 격인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설치했다. 사진은 탕평비가 들어 있는 비각의 현재 모습. 성균관대에서 바로 옆의 정문 공사를 진행하고 있어 주위가 어수선하다. 비문에는 '주이불비 내군자지공심 비이불주 식소인지사의(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고 쓰여 있다.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음은 소인의 삿된 마음이다'로 풀이된다.


최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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