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명의 여인이 한 폭의 그림에 담겼다. 작가는 제목을 통해 작품 속의 여인들이 성매매 여성들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파블로 피카소의 1907년작 ‘아비뇽의 처녀들(원제:아비뇽의 매음굴)’ 이야기다. 피카소는 정면을 바라본 얼굴에 측면에서 바라본 코를 그려 넣는 등 왜곡된 모습을 표현해냈다. 한 미술학자는 작가가 홍등가를 찾곤 했다는 점에 비추어 매독 같은 성병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른 미술학자는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보았다. 자연을 그대로 옮겨 담는 데 충실했던 피카소가 이 작품을 통해 회화의 형식적 특성을 넘어서는 단계로 나아갔다는 설명이다. 전자는 화가 개인의 경험에 중점을 둔 분석이고, 후자는 미술사에 초점을 둔 분석이다. 이처럼 같은 작품을 감상하더라도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해석은 달라진다.
미술사학자들은 작가의 일생이든 기호에 담긴 의미든 저마다의 근거를 들어 작품을 설명하려 애쓴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의 관점을 비판하고 한계를 지적하게 된다. 각자 ‘본인의 시선(작품을 해석하는 데 사용한 미술사 방법론)’이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시선’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접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예술작품은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와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는 대전제에 모두가 동의한다. ‘나만 옳고 남은 다 그르다’는 식의 접근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방법론의 해석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기도 한다. 다른 것은 무조건 잘못됐다는 무분별한 비판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시선을 인정하지만, 나의 시선이 해당 작품을 해석하는 데 더 적합하다는 이야기니까.
낯선 미술 비평 얘기를 나열하며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다름을 존중하라’는 뻔한 메시지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마주친 모든 것들을 평가한다. 오늘 점심, 동료의 옷차림, 커피숍 직원의 서비스 등 온통 평가의 대상이다. 그러나 같은 작품을 보고도 저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은 미술사학자들처럼,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평가 결과가 100% 일치할 수는 없다. 나는 A라고 생각하는 데 친구가 B라고 이야기 했다고 해서 친구의 생각을 바로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본인의 의견에 확신이 들수록 이런 종류의 오지랖이 발동하기 쉽다. 다르다고 여기지 않고 틀렸다고 단정짓는 데서 빚는 촌극이다.
한 때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광고 카피가 인기를 끌었다. 이 메시지에 공감한 사람들 대부분은 소신 있게 본인의 의견을 밝혀야 한다는 원론에 동의하면서도 실천하지는 못하는 경우였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에 걸림돌이 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선이 존재한다는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에게 미술관 투어를 권유해 보고 싶다. 그 곳에 존재하는 수 백만 가지의 시선을 보고서 배우라고. 그리고 판에 박은 당신의 시선과 표현을 바꿔 보려고 노력해 보라고.
김나영기자 /iluvny23@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