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영국/「영국병」 씻고 외국인투자 천국으로(경제를 살리자)

◎공기업·증시 경쟁체제 가속… 생산성증가 “세계 2위”/실업자지원 폐지·구직자엔 수당 “일더하기” 박차지난 5월9일 영국 웨일스에서 열린 한라중공업 현지법인(고용인원 3백여명) 기공식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해 한국기업의 투자진출을 축하했다. 한보철강의 기공식에 주무장관이 대통령 참석을 권유한 사실이 있느냐 없느냐로 책임소재까지 들먹이는 우리 풍토에선 매우 낯선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영국 사람들이 말하는 「우리 기업」은 반드시 영국인 소유가 아니다. 그들은 「영국땅에서 영국인을 고용하고 영국 정부에 세금을 내는 기업」이면 모두 「우리 기업」으로 생각할 만큼 외국인 직접투자에 대해 철저히 우호적이다. 한국 업체의 현지공장 기공식에 여왕이 거침없이 나서는 배경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왕의 체통이 깎인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유럽기업은행 손동수 런던 지점장은 『영국은 중앙정부의 지속적인 노력과 지방정부간의 경쟁이 상승효과를 일으켜 세계에서 기업하기 가장 좋은 나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며 『현대·삼성·대우·LG 등 국내 주요 대기업이 최근 유럽본사를 모두 런던으로 옮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고 말했다. 70년대말까지 영국은 경제 전반의 침체와 비효율, 잦은 노사분규와 인플레성 임금상승에 시달려 기업들이 미련없이 해외로 뛰쳐나가는 악순환을 보였다. 노조 파업이 정권의 붕괴로 이어지기 일쑤여서 「영국병」이라는 안팎의 손가락질까지 받은 영국이 불과 십수년만에 「기업의 천국」으로 변모케 된 대변혁의 배경과 과정은 과연 무엇일까. 영국이 경제구조의 전 부문에 걸쳐 「빅뱅」(큰 변혁)에 성공, 총체적인 위기를 깨끗이 청산하기까지 노·사·정을 포함한 각 경제주체들은 저마다 「빅페인」(큰 고통)의 시련을 감내해야 했다. 대처수상의 보수당 내각은 79년 집권과 동시에 광산노조와의 정면대결에서 승리, 각 경제주체들의 고통분담을 전제로 영국병 치유의 장정을 시작한다. 대처정권은 이 승리를 발판으로 노조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노동법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노조의 파업 권한을 과감히 제한하고 타기업에서의 파업시위를 금지하는 등 당시로선 상상키 어려운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대처수상의 노동개혁 이후 영국근로자의 노조 가입률은 79년 50%에서 95년 33% 미만으로 급락했다. 이제 영국 노조들은 파업을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기업과의 관계에서 협조적인 자세로 돌아섰다는 평이다. 이어 보수당정권은 영국의 고질적인 저성장의 원인이 낮은 투자율 때문이라고 판단해 영국을 외국인들의 직접투자 진출이 가장 용이한 국가로 변모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영국에서 생산활동을 영위하는 업체를 그 기업의 주인이 외국인이건 내국인이건 소유권을 기준으로 차별하는 정책은 전면 철폐했다. 이 과정에서 70년대말까지 영국산업을 대표해온 조선·자동차·광산업 등이 순식간에 도태당하고 실업률은 79년 4.0%에서 85년 무려 11.1%까지 치솟는 등 산업구조 조정의 진통을 겪어야 했다. 올해 영국의 실업률은 6.5% 안팎을 기록할 것으로 추산된다. 유럽연합(EU)국가들의 평균치(96년 11.5%)보다 월등히 낮다. 79년 대처 집권이후 94년까지 15년 동안 영국 제조업근로자 1인당 생산증가율은 일본을 제외한 서방선진국 중 최고를 기록, 영국 경제가 부흥의 기반을 착실히 다지고 있음이 입증됐다. 공기업 민영화는 보수당 정권의 개혁조치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분야다. 브리티시 가스, 브리티시 페트롤리엄, 브리티시 스틸, 브리티시 텔레콤, 브리티시 에어웨이 등 영국을 대표하는 주요 대기업은 대부분 79년이후 민영화된 기업이다. 비효율적인 국영기업을 가차없이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영국정부는 더이상 국민 세금을 경영에 실패한 기업에 쏟아붓지 않는다는 굳은 의지를 천명했다. 주요 기업이 흔들릴 때마다 재정 지원으로 회생시키던 그간의 관행에서 탈피, 정부의 시장개입 자제방침이 확고해지자 경영인들도 노조에 대한 호혜적 자세에서 벗어나 기업 생존을 최우선 고려사항으로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됐다. 86년 10월 영국정부는 대대적인 증시개혁을 단행한다. 증권거래 수수료의 자유화, 증권사 소유제한 철폐, 업무장벽 폐지 등으로 요약된 「빅뱅」은 영국 증권산업에 일대 충격을 몰고 온다. 이 과정에서 당시 10대 증권사 중 9개가 도산하거나 외국인에 흡수합병되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유명한 베어링사의 도산에 대해서도 시장원리에 따라 가차없이 도태시키는 선택을 고수한 결과 최근 런던 증시는 동경, 싱가포르, 프랑크푸르트, 홍콩 등 경쟁상대를 물리치고 뉴욕증시에 이어 세계 2위를 고수하고 있다. 영국의 금융개혁은 기업간 금융관행에도 메스를 가했다. 영세기업에 대한 하청·납품대금 늑장지급을 시정하기 위해 ▲대금지급 지연에 대한 고소 및 재판절차 간소화 ▲정부·공공기관·전경련의 신속지급규약(Prompt Payment Code) 준수 ▲지연지급에 대한 이자부과 법제화 등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교육분야도 경제구조 개혁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88년 교육개혁법, 92년 고등교육개혁법·학교교육법 등의 제정을 통해 학부모에게 학교 선택권을 부여하고 성역처럼 여겨진 「교수 종신제」에도 손을 댄다. 97회계연도까지 3년간 2만4천명에 이르는 영세업체 종업원에 대해 기술교육을 실시했다. 그냥 놀고 먹는 풍토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던 영국의 사회보장제도는 근로의욕을 가진 사람에게 재취업과 사회복귀를 돕는 방향으로 개편됐다. 실업자 소득지원제도는 폐지되고 구직자수당(Jobseeker’s Allowance)이 도입되며 구직에 소극적인 사람에 대해선 불이익을 주는 제도가 시행됐다. 2년이상 실업상태인 사람이 기술교육을 희망하면 기술교육비를 국가가 지원하며 여성의 고용기회를 확대하고 고용차별을 금지하는 입법조치가 잇달아 추진됐다. 18∼19세기에는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임을 자랑했으나 금세기초 1·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잠시 한눈을 팔다 조락의 길로 치달았던 영국. 그 영국은 국난을 맞아 노·사·정 모든 경제주체들에게 발상과 행동을 동시에 바꾸는 변혁을 요구했고 이제 지난 십수년간의 고통을 딛고 옛 영화의 부활을 맞고 있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동서냉전 종식 이후 세계는 이제 명백히 자본주의 각국의 「개혁경쟁」 시대로 바뀌었다. 영국·미국·뉴질랜드 등 개혁의 선두주자들은 이미 그 열매를 따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제2부 끝/런던=유석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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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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