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 8일] 뉴올리언스 전투

1815년 1월8일 뉴올리언스. 영국 정규군 1만명과 미국 민병대 4,000여명이 맞붙었다. 결과는 영국의 참패. 장군 1명을 포함해 3,336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국은 전사 21명에 약간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다. 완벽한 승리다. 같은 시기 코네티컷주 하트포트시. 뉴욕주와 뉴잉글랜드 등 북동부 6개 주의 대표가 모임을 갖고 수정헌법을 발의한다. 골자는 대통령의 권한 축소.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서다. 연방을 탈퇴해 식민지로 되돌아가자는 주장도 나왔다. 상반된 두 가지 사건은 영미전쟁(1812~1814년) 결과에 반영되지 않았다. 이미 보름 전에 벨기에 겐트시에서 종전협정이 체결됐기 때문이다. 겐트조약이 워싱턴에 알려지기까지는 두 달이 걸렸다. 종전 후 덤으로 얻은 승리였지만 미국인들은 뉴올리언스 전투에 열광했다. 반면 영국에 대한 양보와 화해를 주장한 하트포트 회의는 반역으로 몰렸다. 독립국처럼 행세하는 주가 사라지고 어디에서나 성조기가 펄럭였다. 미국역사는 1815년부터 1830년까지 15년을 ‘민족주의 시대(Nationalist Era)’로 분류한다. 외국과 싸우기만 하면 여야가 단결하는 정치풍토와 호전적 기질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다. 경제분야에서는 클레이 상원의원이 주창한 ‘미국체제(American System)’ 이론이 시대를 덮었다.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해 국내산업을 발전시키자는 내용이다. 미국체제하에서 도로와 철도, 운하 등 교통망이 확충되고 서부 진출에 불이 붙었다. 연방정부는 직접조세권을 따냈다. 모두 뉴올리언스 전투의 결과물이다. 미국인들이 ‘전투 중의 전투(Battle of Battles)’라고 기억하는 뉴올리언즈 전투는 ‘욕심 많은 미국’을 낳았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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