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꽃 흐드러진 제주도 풍광. 흥을 돋우는 해녀들의 춤사위와 노래가 무대의 시작을 알린다. 이야기는 제주도에 신임목사가 부임해 오면서 시작된다. 함께 온 수행관 배비장은 죽은 아내를 위해 지조를 지키겠다는 강직한 인물.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기던 목사와 뭇 비장들은 제주 최고의 기생 애랑을 그에게 보내 유혹하라 하고, 꼿꼿했던 배비장은 애랑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새 사랑에 빠지고 만다.
고전 콘텐츠 소설'배비장'이 각색돼 무대에 다시 오른다. 1966년 극단 예그린이 무대에 올려'국내 창작 뮤지컬 1호'로 인정받은 작품이 서울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개관을 기념해'살짝기 옵서예'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1996년'애랑과 배비장'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된 후 잊혀져 가던 작품을 CJ E&M이 제작사 뮤지컬해븐과 손잡고 17년만에 되살렸다. 연출가 김민정과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맨오브라만차''나인' 등을 선보인 안무가 출신 연출가 구스타보 자작(Gustavo Zajac)이 공동 연출했다.
뚜껑을 연 창작 뮤지컬'살짜기 옵서예'는 먼저 배우들의 안정된 기량이 눈에 띈다. 애랑을 연기하는 김선영은 매혹적인 몸짓과 눈매로 교태를 부리며 배비장을 유혹한다. 홍광호(배비장)는 정확한 발음과 빼어난 가창력으로 무대를 장악한다. 무엇보다'약방의 감초'방자가 전하는 익살스러움이 극의 흥미를 더한다. 대학로 공연'원조 멀티맨'으로 에너지 넘치는 연기력을 인정받은 임기홍이 방자 역을 맡았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이 작품을'방자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특유의 익살스러움으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원작 판소리계 소설'배비장전'의 각색 과정에서 군데군데 극의 개연성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배우들의 호연(好演)과 풍성한 노랫소리가 관객의 엉덩이를 들썩이며 커버한다.
무대 위 4m 높이의 돌하르방은 이 공연의 또 다른 마스코트다. 돌하르방에는 7억원의 콘텐츠진흥원의 동반성장 영상 지원금에 힘입어 3D 매핑과 홀로그램 등 디지털 기술이 함께 버무려졌다. 입체감 있는 물체에 영상을 덧씌우는 기법인 3D 매핑은 차갑고 시커먼 돌덩이에 친근감을 불어넣는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거나 혓바닥을 내미는 등의 방법으로 웃음을 선사한다. 기대보다 단순한 기술에 살짝 실망감을 표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고전 콘텐츠가 첨단 기술을 만나 빚어낸 결과물에 한국 창작 뮤지컬의 무한한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공동 제작자인 뮤지컬 해븐의 박용호 대표는 기자간담회에서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옛 것이 때로는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주춧돌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이 작품이 증명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47년 동안 1호 창작 뮤지컬의 자존심을 지켜온'살짜기 옵서예'는 한 바탕 웃을 수 있는'우리 색깔'의 뮤지컬이자, 외국에서 들여온 대형 라이선스 대작과 당당히 맞설 가능성을 지닌 반가운 작품이다. 배비장은 최재웅, 신임목사에는 송영창, 방자에 김성기가 번갈아 출연한다. 3월 31일까지. 4만4000∼9만9000원. 1588-06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