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돌아왔다. 1982년 1월5일 국무회의는 야간 통행금지 해제를 의결한다. 신년의 거리엔 기쁨이 넘쳤다. 택시를 잡기 위한 귀가 전쟁과 통금 위반에 따른 즉결심판이 없어졌다. 도로 곳곳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도 걷혔다.
통금 사이렌을 은근히 기다리던 청춘 남녀의 아쉬움 속에 야간 통행금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45년 9월7일 하지 중장의 미군정의 포고문 1호로 발동된 지 37년 만이다. 검열과 통제를 받던 언론은 ‘전두환 대통령의 결단’을 치켜세웠다. 같은 날 발표된 중ㆍ고교생의 두발과 복장 자유화 조치와 더불어 통금은 5공 정권의 대표적인 대국민 유화책으로 꼽힌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성인영화도 줄줄이 나왔다.
정치를 제외한 자유화의 물결은 부작용을 수반했다. 디스코테크와 카바레, 룸살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대형폭력조직이 돋아 났다. 퇴폐향락문화가 한국의 고질병으로 자리잡은 것도 이 무렵이다.
군사정권의 선심성 정책에서 비롯되고 후유증도 있었지만 통금 해제는 기대 이상의 경제적 효과를 낳았다. 서비스 부문의 고용이 늘고 얼어붙은 기업 마인드와 소비심리가 살아났다. 비행기의 이착륙이 시간의 구속에서 풀려나 바이어와 관광객의 입국도 늘었다.
1980년 마이너스 0.2%를 기록한 민간소비 증가율이 1982년 6.9%, 1983년 9.0%로 높아졌다. 서비스업은 같은 기간 중 2.2%에서 10.8%, 10.0%로 성장했다. 한국 경제는 1982년 7.2%, 1983년 10.7%라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2차오일 쇼크와 10ㆍ26사건의 여파로 인한 침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돌려 받은 4시간의 자유’는 37년간의 속박보다 훨씬 강했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