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우울한 설(사설)

민족의 명절 설이 올해처럼 썰렁한 적이 있었을까. 고향으로 향하는 민족의 대이동은 이어지고 있지만 이번 설처럼 발길이 무거웠던 적이 있었을까.부도난 한보그룹의 하청회사 직원들의 시위현장에 등장했던 「어머니, 이번 설엔 집에 못가게 됐습니다」고 쓰인 피켓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 설이다. 보너스도, 임금도 제대로 못 받았어도 홀쭉해진 선물꾸러미나마 준비한 사람은 직장을 잃어 고향에도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 비하면 다행이다. 경제불황으로 온 나라가 시름에 젖어 있다. 수출은 갈수록 안되고 수입은 갈수록 늘어난다. 외채는 자꾸 늘고, 원화의 가치는 자꾸 떨어지고 있다. 부도나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다. 기업들은 감량경영이다 뭐다 하며 직원들을 자를 궁리만 한다. 봉급쟁이는 실직을, 자영업자는 부도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뎌가고 있던 터다. 그러던 차에 재계랭킹 14위 운운하던 한보그룹이 온갖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며 사상누각처럼 무너졌다. 관련회사는 물론이고 아무 관련없는 회사들까지 부도 회오리에 휘말려 줄줄이 쓰러지고 있다. 부도를 낸 장본인은 잘못된 사실을 이실직고하여 이 땅에 그런 엉터리가 다시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마지막 봉사할 길이련만 보신용으로 써먹으려는지 입을 열듯말듯 저울질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무리를 알면서 인허가를 내주고 부실대출을 눈감아준 정부당국자나 은행장들은 하나같이 발뺌하기 급급하고, 돈 받은 꼬리가 잡힌 정치권 인사는 억대의 돈을 받고도 「떡값」운운하는가 하면, 어떤이는 아예 한푼도 안 받았다고 딱 잡아떼기도 한다. 모든것이 옛날 그대로다. 비리의 수법도, 비리의 처리방법도 구태의연하다. 그것이 사람들을 더욱 절망케 한다. 입만 열면 나라를 걱정하던 사람들의 마비된 양심을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는 시점에서 과거보다 더한 비리를 보는 것은 참담하다. 설날아침 가족들이 오붓이 모여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복을 기원하며, 덕담을 나눌 수 있는 서민들의 작은 행복과 여유마저 잃게 한 책임을 위정자들은 통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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